핏빛 자오선 (Blood Meridian) / 코맥 매카시



읽는 내내 소년에게 완전히 몰입해서 바짝 긴장하고 읽었다. 마지막 한 챕터를 남겨두고 나서는 주인공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괜히 아껴 읽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좌절감과 한계를 느끼게 하는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이 요즘 좋아졌다. '제7의 봉인' 볼 때도 죽음이 그렇게 마음에 들더니, '핏빛 자오선'에서는 끈질기게 소년을 쫓아오는 판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읽는 동안 틈틈이 구글 Cultural Institute에서 Scalping도 찾아보고 지도도 찾아보고 여러 사이트에서 결말을 두고 토론 벌인 것도 찾아보고 학구적인(?) 덕질도 엄청나게 할 정도로 되게 적극적으로 읽은 몇 안되는 책이 되었다.

구글링해보니 리들리 스콧을 비롯해서 여러 감독들이 영화화 시도를 했지만 모두 무산된 모양이다. 책을 읽으면서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장면들이 떠올라서 폴 토마스 앤더슨이 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선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도 꽤나 되는 듯. (그리고 글랜턴은 꼭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팬텀 스레드를 끝으로 은퇴한다니 이제 내 작은 소망은 박살나버렸다. 심지어 팬텀 스레드 감독이 폴 토마스 앤더슨임..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소설의 흐름이 소년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중반부부터는 소년에게서 멀어져 인디언 사냥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인지라 영화화된다면 이런 형식을 어떻게 표현해낼까 궁금하다. 소년과 판사 역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기괴함 +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엘 토포'가 '핏빛 자오선'이랑 가장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가 아닐까 싶어서 한번 보려고 했는데 유투브에서 클립을 찾아서 보니 너무 징그러워서 도무지 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 :


아이의 안에는 이미 이유 없는 폭력이 스멀스멀 싹트고 있다. 모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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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스터리야. 사람은 자기 정신은 알 가능성이 상당하지. 왜냐하면 살려면 알아야 하거든. 자기 마음도 알 수야 있지만 알기를 원치 않지. 정말 그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 게 최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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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들 두 무리는 자정의 고원에서 헤어져 서로가 온 길을 되짚어 나아갔다. 여행자란 으레 다른 이가 이미 걸어간 길을 끝도 없이 가야 하는 운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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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In Arcadia Ego. (지상 낙원에도 죽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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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많은 것이 신비의 베일로 싸여 있다 해도 세상의 경계는 그 속에 포함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세상이라는 것에는 측정 기준도 경계선도 없으며, 그 안에는 더없이 끔찍한 생물과 다른 빛깔의 인간과 그 누구도 본 적 없으나 자기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낯설지 않은 존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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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이든 다른 책이든 책 속에 적힌 운명은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해.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나?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거짓 책이고, 거짓 책은 절대 책이라고 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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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막고자 하셨다면 벌써 막지 않았을까?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다른 동물은 또 어떤가?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었지.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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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글랜턴은 꺼져 가는 모닥불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부하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많은 이가 불구가 되었거나 죽음을 맞았거나 사라져 버렸다. 델라웨어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는 계속 모닥불을 응시했다. 설령 어떤 징조를 본다 하더라도 별 차이를 만들지 못할 터였다. 그는 살아남아 서쪽 바다를 볼 것이고, 어떤 일이 뒤따르든 변할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매 시간을 충실히 살아가기에. 그의 삶이 국가와 부하와 공존하며 이어지든, 심지어 그냥 끝장이 나든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결과를 예측하는 일을 오래전에 포기했고, 이로써 부하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기실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자신에게의 세상의 의미를 모두 자기 안에 담았다. 그리고 스스로 신의 섭리를 주장하며 원초적 돌에 계약을 새기고 선언하기 위해 부하들의 운명을 강탈하고는, 인간이나 태양이나 길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태양을 지배하기라도 한 양 냉혹한 태양을 내쫓아 최후의 암흑 속으로 달려들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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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