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Slaughterhouse Five) / 커트 보네것

 

제 5도살장 / 커트 보네것

2017. 07. 3 ~ 2017. 07. 10

#1.

진부한 2차 대전 소설이었다면 책에서 언급했던 그대로 훤칠한 배우 같은 영웅들이 전쟁터에서 악당들을 물리치고 귀환하는 시시한 이야기를 다뤘겠지만, 독특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찐따 같은 주인공이 업적이랄 만한 것 하나 세워 보지도 못하고 바보짓만 하다가 전쟁터에서 돌아온다. (그나마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마저도 뻘짓을 하다가 개죽음을 당한다...) 소재 자체도 '2차 세계 대전'을 중심으로 다룬 듯하지만, 이건 이야기의 전개에 필요한 밑바탕에 불과하고 권태롭게 느껴질 정도로 잔잔한 시간 여행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 참신했다.


#2.
시간 여행이 전혀 역동적이지 않고 얻는 것 하나 없이 추억만 돌이켜볼 뿐이라는 점에서 읽는 내내 쓸쓸함과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이건 시간 여행을 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 '미스터 노바디'와도 유사점이 있다.주인공 빌리는 '슬링 블레이드'의 빌리 밥 손튼을 닮았을 것 같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척 쓸쓸해서 읽는동안 자꾸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고딩 때 성적표 나오는 날 / 수능 끝난 다음날 / 수면 부족으로 우울증에 걸리는 날이면 들었던 곡 (야자 금지곡 3번이기도 했다)

#3.

"내가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전히 과거에 잘 살아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순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트랄파마도어인은 예를 들어 우리가 쭉 뻗는 로키산맥을 한눈에 볼 수 있듯이 모든 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고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떤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 마치 줄로 엮인 구슬처럼 어떤 순간에 다음 순간이 따르고 그 순간이 흘러가면 그것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여기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다."

*

벽에 걸린 기도문을 본 많은 환자가 그 기도문이 자신들이 계속 살아가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

 

"정말 지구인다운 질문이군요, 필그림 씨. 왜 당신이냐고? 말이 나와서 이야기인데 왜 우리여야 할까요? 왜 뭐여야 할까요? 그냥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호박에 들어 있는 벌레를 본 적이 있나요?"

"네."

"자, 여기 우리도 그런 거죠, 필그림 씨.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 있는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왜도 없습니다."

*

 

당연하지만 연극에 나오는 여자들은 사실 남자였다. 시계가 막 자정을 알렸다. 신데렐라가 탄식하고 있었다.

 "어쩌나, 시계 종이 쳤네- 어머나, 내 운명은 좆됐네."

 

*

빌리는 담요를 다시 머리까지 덮었다. 어머니가 정신병동으로 면회올 때면 그는 늘 얼굴을 가렸다 - 어머니가 갈 때까지는 아픈 게 늘 훨씬 더 심해졌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못생겼다거나, 입에서 악취가 난다거나, 성질이 더럽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완벽하게 착하고 표준적이고 머리가 갈색이고 피부가 하얀 여자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라는 이유로 빌리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자신이 창피하고 배은망덕하고 약한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애써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유지시켜줬는데, 빌리는 사실 생명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책은 킬고어 트라우트가 쓴 '4차원의 미치광이들'이었다. 이것은 병의 원인이 모두 4차원에 있기 때문에 정신병을 치료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3차원의 지구인 의사들은 그 원인을 전혀 알 수 없었고, 심지어 상상하지도 못했다.

 

*

우주의 방문객은 기독교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기독교인이 그렇게 쉽게 잔인해질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는 적어도 문제 가운데 일부는 신약의 이야기가 너무 엉성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처음에도 복음서들의 의도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낮은 자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자에게까지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실제로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을 죽이기 전에 반드시 그가 연줄이 시원찮은지 확인해라. 뭐 그런 거지.

 

그리스도 이야기의 약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가 사실은 우주 최강의 존재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방문객은 그렇게 말했다. 독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어서, 십자가 처형 대목에 이르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즈워터는 그 대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오, 이런 - 이 사람들은 린치할 사람을 잘못 고른 게 틀림없어!

 

*

트랄파마도어에는 다섯 가지 성이 있어, 각각 새로운 개체의 창조에 필요한 단계를 이행했다. 그러나 빌리에게는 똑같아 보였다 - 그들의 성적인 차이는 모두 4차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번에도 빌리는 그 일곱 가지 성 가운데 둘을 뺀 나머지 다섯 가지가 아기를 만드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4차원에서만 성적으로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다른 날에는 당신이 보거나 읽었던 어느 전쟁 못지않게 끔직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 보고 말지요.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는 기분좋은 순간들을 보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 동물원의 오늘처럼 말입니다."

 

*

갑자기 빌리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 생각의 진실성에 깜짝 놀랐다. 그거면 빌리 필그림에게 좋은 묘비명이 될 것 같았다 - 또 나에게도.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

가장 파괴적인 거짓은 미국인이 돈을 벌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는 돈을 버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탓하고 탓하고 또 탓한다. 이런 내적인 비난은 부유하고 강한 자들에게는 보물이 되어 왔다. 그 덕분에 그들은 예를 들어 나폴레옹 시대 이후 다른 어떤 지배계급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해야 할 일이 적었다.

많은 새로운 것이 미국에서 나왔다. 이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 선례가 없는 것은 위엄을 잃은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

 

영국인 대표는 생존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외모에 대한 자부심을 포기하면 곧 죽게 됩니다." 그는 그래서 죽은 사람을 여러 명 보았다고 말했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는 걸 포기하더니, 면도하거나 세수하는 걸 포기하더니, 침대에서 나오는 걸 포기하더니, 말하는 걸 포기하더니, 죽더라고요. 그 점에 대하여 이거 한마디는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게 아주 쉽게 고통 없이 가는 방법인 건 분명하다." 뭐 그런 거지.

 

*

"바나나를 깎아도 저것보다는 나은 인간을 만들 수 있겠어."

 

*

빌리 필그림은 이 노래와 이 행사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울컥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늙은 패거리, 늙은 연인과 친구가 있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리웠다. 사중창단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화음을 실험하고 있었다 - 그들의 의도에 따라 화음이 시큼해지고, 더 시큼해지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시큼해졌다가, 이어 숨막힐 정도로 달콤한 화음이 등장했다가, 다시 시큼한 화음 몇 개가 나타났다. 빌리는 변화하는 화음들에 강력한 정신 신체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입에는 레모네이드 맛이 가득찼고, 얼굴은 괴상하게 바뀌었다. 형벌대라고 부르는 고문 기계 위에서 진짜로 몸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