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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E.M.포스터)




    「자연의 봄과 사람의 봄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한쪽은 추켜세우면서 다른 한쪽은 도덕이 어쩌고 하며 깎아내립니다. 두 가지 모두 똑같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걸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세실은 입꼬리가 뒤틀렸다.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가? 물론 그는 전체로서의 세상을 경멸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세련의 징표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치는 경멸의 편린들에는 몹시 예민했다.


    약혼이라는 것은 몹시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행복한 엄숙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간 뒤에는 비브 목사뿐 아니라 프레디마저 다시 약혼을 비판적으로 바라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안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 그리고 서로가 서로 앞에 있을 때 그들은 진실로 유쾌했다. 그것은 몹시 신기한 힘이다. 우리 입술뿐 아니라 심장까지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막강한 힘을 다른 막강한 힘에 비교해 보자면, 가장 비슷한 경우는 낯선 종교의 사원에서 느끼는 힘일 것이다. 사원 바깥에 서 있으면 그 종교를 조롱하거나 반대할 수 있고, 기껏해야 미약한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사원 안에 들어가면 그 신과 성인들을 모를지라도 진정한 신자들만 곁에 있다면 우리 역시 진정한 신자가 되고 만다.


    마침내 실내로 들어간 루시는 버터워스 노부인과 차를 마시면서 미래를 대강이라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과 인생은 연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기치 못한 배경의 실수 하나, 객석의 얼굴 하나, 관객의 반응 하나에 공들여 준비한 동작은 갑자기 아무 의미 없어지거나 아니면 너무 많은 의미를 담게 된다.


    인생은 정리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혼돈스러우며, 우리는 언제나 <신경>이라든가 다른 피상적인 말들로 내면의 욕망을 가려 덮으려고 한다. 


    「그 사람은 당신과 어머니를 보호하면서 충격받으라고 가르치고 있더군요. 충격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는 건 당신과 어머니인데 말입니다. 역시 그다운 행동이지요. 그 사람은 여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아요. 유럽을 천년 동안 붙잡아 매둘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는 매 순간 당신을 자기 뜻대로 빚어내고, 당신이 어떻게 해야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여성스러울 수 있는지 가르쳐 줄 겁니다. 남자가 생각한 여자다움을 말이에요.」



    「나는 보호받기 싫어요. 어떤 게 여자다운 건지 옳은 게 뭔지 나 자신이 판단하고 싶어요. 보호받는다는 건 나에게 모욕이에요. 내가 왜 진실과 바로 만나지 못하고 당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해야 하죠? 그게 여자의 자리라고요? 당신은 우리 어머니를 한심하게 여겨요. (중략) 당신은 아름다운 것들을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그걸 사용할 줄은 모르니까요. 당신은 미술과 책과 음악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내게도 그런 걸 강요하려 했어요. 나는 음악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런 것에 숨 막혀 죽고 싶지 않아요. 왜냐면 사람이 그보다 훨씬 아름다우니까요.」


    비브 목사는 이런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중략) 인내와 교양 아래 말없이 감추어져 있던 그의 금욕주의가 표면으로 솟아올라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났다. <결혼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제하는 건 더 좋은 일이다>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사람들의 파혼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은근한 기쁨을 느꼈다. 루시의 경우는 그가 본래 세실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욱 기쁨이 컸다.


    세실에게서 도망쳤을 때 루시는 윈디 코너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집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프레디에게는 집이 있었다. 그의 삶과 생각은 여전히 반듯했으니까. 하지만 일부러 정신을 비틀어 버린 사람에게는 집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이 비틀렸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걸 인식하는 데는 바로 정신이 필요하니까.




    ***


    오글거림, 막장, 질질끌기가 없어서 로맨스 싫어하는 내가 재밌게 읽은 몇 안되는 로맨스 소설 중 하나. 시대상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남주인공, 여주인공 모두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성적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난 인물들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 읽고 나서 영문학계 남주인공 투톱은 두 도시 이야기의 시드니 카턴과 전망 좋은 방의 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나 아웃랜더의 제이미,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걸 보면 영국은... 로맨스의 선진국이다. ㅋㅋㅋㅋ


    yunic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