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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스파이어 / 조이스 캐럴 오츠

     

     

     

     

    우리를 가장 깊은 곳에서 이어주는,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박탈당하고 나서야 느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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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그때쯤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야말로 몇몇 남자들, 수억 명의 삶과 죽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극소수 교활한 남자들의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그저 밖으로 끄집어낸 결과에 불과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두 가지 도덕, 즉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었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건 말건 해도 된다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이유로 일을 저지르는 삶과, 또는 자기 행위가 범죄적이거나 벌받을 일이거나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에 자기가 한 짓을 시인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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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와 돌아보면 결성 첫해야말로 폭스파이어의 역사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지만 그때 우리는 몰랐다. 당시에는 결코 모르게 마련이다. 그때는 삶을 직접 부딪치며 살아내고, 돛을 모두 올려 전속력으로 달리며, 열에 들떠 움직인다. 모든 게 안전해지고 과거지사가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 난 그때 행복했어. 지금은 다 끝난 일이고, 그때 내가 행복했다는 걸 이젠 알 수 있어." 어쩌면 그런 깨달음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이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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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라나 맥과이어의 사촌들이 살고 있는 포크 오리스캐니의 한 동네에서는 작고 가여운 여섯 살짜리 소녀가 누군가에게 면도날로 난도질을 당했다. 그 애의 얼굴은 신문에 따르면 '갈기갈기 찢겼고', 배와, 심지어는 조그만 생식기까지 난도질을 당하는 바람에, 어느 자동차 운전자가 빈터에서 그 애가 기어가는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그게 쥐인 줄 알았다고 했다...... 고백 어디에도 실릴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는, 렉스를 제외하고서는 우리 중 누구도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렉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증오하는 거야, 알겠어? 개새끼들! 이게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증거란 말이야. 그들 대부분은 아마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할 걸.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증오해.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를 죽여버린 다음에 꿈에서 일어난 일인 양 넘어가버릴 거라고. 영화에 나오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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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로, 무슨 목적으로, 그런 상실이 일어났는가? 만약 한 종이 태어난다면 그것이 소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오로지 죽기 위해서라면 왜 태어나는가? 멸종의 길을 분명 걷게 된다면 왜 생성되는가? 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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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어른이라면 절대 기소될 리 없는 하찮은 '범죄', 이를테면 가출이라거나, 무단결석이라거나, 교화불능이라거나 - "그 '교화불능'이라는 게 뭐냐고." 렉스가 말했다. "네 태도에 어른들 목적을 갖다 대겠다는 거뿐이잖아." - 문란하다는 죄로 기소되어 레드뱅크에 몇 년씩 갇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오로지 여자들만이 문란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절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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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이 고백을 옮겨 적으면서 깨닫게 된 사실인데,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에 많은 걸 알았다는 사실이다. 훗날 우리가 그 시절에 알고 있었다고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러니 모종의 망각이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를 재발명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알았던 것의 상당 부분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잊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기나 그와 같은 것을 꾸준히 적어두지 않았다면(요즘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불가사의하면서도 사람 마음을 심란케 했던 일들을 성공적으로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렉스가 레드뱅크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폭스파이어 멤버들이 그녀를 위해 마련했던 축하 파티에서 취해 있던 모습. 그때 렉스는 매디에게 자기가 레드뱅크에서 사무치게 깨달은 진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물론 남자들은 적이다. 하지만 남자들만이 적은 아니다. 충격적인 건 소녀들과 여자들도 때로는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충분히 자매가 되고도 남지만, 할 수만 있다면 테리오 신부가 말해줬던 것보다 훨씬 더 사악하게 우리의 고혈을 빨아먹을 터이다. 네가 그러는 게 아니다. 그냥 그들이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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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록 또는 고백록에서 필자는 일화, 인물, 장소, '플롯' 등등을 발명할 권한이 없고, 모든 걸 일어난 대로 적어야 한다. 상상력이 아니라 기억력이 동인이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건 언어가 도구로 쓰이는데, 언어라는 게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언어가 없다면, 우리가 거짓말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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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오래전 한때, 늙은 테리오 신부가, 사제직을 박탈당한 알코올중독 부랑자가, 다리가 짧아서 발이 땅에 닿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공원 벤치에 앉아서, 그의 얘기를 듣고파 초조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던 렉스 새도프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던 걸 생각하고 있다. 개개인은 결코 불의를 개선할 수 없다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지구는 고통을 겪은 사람뿐만 아니라 침묵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곱게 갈린 뼈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는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좀체 견디질 못하지만 그들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한다고. 그러자 렉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뭘 수 있는데요. 노인은 렉스의 말을 못 들은 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존재에게 내려진 저주, 서로를 상품으로 파악하는 저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정한 비극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물건으로 이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물건으로 사용하고 전시하고 파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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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알 수 있었지. 그녀가 영혼은 참 맑은 좋은 사람이란 걸. 지능도 높고. 하지만 똑똑하진 않다는 걸. 나는 절대 직설적으로 질문하지 않았어. 슬쩍 찔러보는 식으로, 권투 선수가 잽을 먹이는 것처럼 시작했지. 그녀의 말투가 부자들이 부지불식중에 내뱉는 말투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제 손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 그저 돈을 물려받아 성장한 부자들 있잖아. 그녀를 보니까 꼭 태평양 무슨 섬에서 탐험가들이 발견한 새 같은 거야. 날지 못하는 새. 그런 새들의 날개는 짧고 덜 자라 있어. 섬에 포유류 포식자가 있어 본 적이 없다 보니, 어, 한 수천 년 동안은 그랬겠지? 아무튼 그래서 새들이 날개가 필요 없어진 거야. 날개를 잃어버린 거지. 그러다가 새를 먹는 포유류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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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KJ는 자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냥 의식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자, 렉스는 어째서인지 그 남자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가족석에, 전용 자리에 앉아 기도하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던 모습. 어쩌면, 정말 어쩌면, 완벽한 모양의 바윗덩이처럼 수상쩍고 완고한 이 행동은 이 망할 새끼의 종교와 관련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자의 특수한 기독교 신앙 말이다. 성공회. 이 부자 남자의 종교.

    마치 공장과 저택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수천 명의 인간들을 고용하고 있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 이 새끼는 하느님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 무슨 또 다른 부동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인이 껴 들어갈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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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을 돌이킬 때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일단 어떤 장소를 떠나면, 거기서 추방당하면, 그곳을 다시 찾는 모든 방문은 하나의 경험으로 녹아들어, 이내 꿈처럼 애달고 아리송한 얼룩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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