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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제가 속했던 동아리는 ‘넥스트 핫 싱(Next Hot Thing)’이란 이공계 전공자들의 연합 동아리였어요. 동아리 이름이 너무 부끄러워요. 그 이름을 지은 선배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90년대 말 실패한 아이돌 그룹 이름 같지만, 서로 다른 과 학생들이 모여 미래지향적인 연구와 발명을 하는 동아리였죠. 실상은 더 번듯한 동아리에서 떨려 나오거나 애초에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한 괴짜들만 모여 있었답니다. 애완용 초파리 박람회를 개최한다든가(아무도 애완용으로는 키우고 싶어 하지 않죠) 자동으로 머리 감아주는 기계를 만든다든가(왜 아직 안 나왔는지 모를 발명품이지만 여기 머리카락을 빌려주었다가 다 뽑힐 뻔했어요) 솔잎 음료수로 달리는 자동차를 시연한다든가(1미터도 채 움직이지 못했죠) 《수강신청을 돕는 해킹》이라는 소책자를 인쇄한다든가(폐부 위기였고요)…… 그런 활동들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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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그동안 저는 기준 오빠를 만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늘 생각했어요. 기준 오빠는 저의 기준이 되어버렸던 거예요. 누굴 만나도 그때 오빠가 내 손에 작은 돌멩이들을 쥐여줄 때의 친밀감과 충족감을 느낄 수는 없었어요. 펭귄 수컷처럼 돌을 선물하던 남자 때문에 제 나머지 연애들은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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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8, 9는 앞의 세 팀보다도 극단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더군요. 중국 팀이 태연한 얼굴로 프레젠테이션을 함께했습니다. “뇌 구조와 전기 신호를 복제할 거야.” “그럼 몸은?” “몸이 왜 필요해? 이 모든 것은 결국 인류가 이 거추장스럽고 암이나 피워내는 몸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아니야?” “일단 설명이나 해봐.” “냉동이 중요해. 피를 비롯해 수분 한 방울 없이 뇌를 냉동 처리한 다음…….” “됐어. 나머지는 내가 읽을게.” “네가 사랑하는 게 기준이의 몸이야? 정신 아니야?”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각지고 나약한 몸을 제가 사랑하긴 했어도, 사실 오빠와 대화만 할 수 있다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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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기준 오빠가 저를 가볍게 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너는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널 한 번 더 본 것만으로 그 추운 곳에 가서 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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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지렁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끝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우리는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무책임한 쓰레기만 끝없이 만들고 있었다. 100억에 가까워진 인구가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으니, 멸망은 어차피 멀지 않았었다. 모든 결정은 거대 자본에 방만히 맡긴 채 1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바꾸고, 15분 동안 식사를 하기 위해 4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플라스틱 용기들을 쓰고, 매년 5천 마리의 오랑우탄을 죽여 가며 팜유로 가짜 초콜릿과 라면을 만들었다. 재활용은 자기기만이었다. 쓰레기를 나눠서 쌓았을 뿐, 실제 재활용률은 형편없었다. 그런 문명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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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멸종이 끔찍했다. 멸종, 다음 멸종, 다다음 멸종. 사람들 눈에 귀여운 종이 완전히 사라지면 ‘아아아’ 탄식한 후 스티커 같은 것이나 만들었다. 사람들 눈에 못생기거나 보이지 않는 종이 죽는 것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잘못 가고 있었다. 잘못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이 언제나 은은한 구역감으로 있었다. 스스로 속한 종에 구역감을 느끼기는 했어도, 끝끝내 궤도를 수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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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최초로 섹스를 하지 않는 세대라고, 윗세대들은 우리를 놀리듯이 부른다. 섹스를 스티커로 교체해버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쾌감 패턴 쪽이 훨씬 즐겁다. 최초로 쾌감 패턴을 만든 것은 엘엘로 알려져 있는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여러 세대를 거쳐 최근에는 쾌감 패턴을 만드는 데 특출한 재능을 가진 패턴 마스터들이 등장했다. 마스터들이 만든 패턴은 아마추어의 생산물과는 수준이 달랐다. 어릴 때 ‘너를 생각하며 이 패턴을 만들었어’ 류의 메시지와 함께 서툴게 만든 패턴을 먼 곳의 친구와 주고받았던 게 약간 쑥스러워질 정도다. 근사한 패턴을 즐기고 나면 해탈한 사람처럼 무욕해져서 주변의 누군가와 뭔가를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또 서로가 만든 패턴이 무척 취향이라고 해서 굳이 누군가를 직접 만나러 가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적정 인구 수를 유지하는 게 지하도시들의 과제였으므로 쾌감 패턴은 때에 따라 권장되거나 탄압받기도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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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전 세계적인 교육 개혁이 시행되었다. 모든 시험이 오픈 북이 되었다. 시험은 지식 습득의 확인이 아니라 사고 과정과 가치관을 겨루는 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장기적으로 여겨지고는 있었지만, 새끼손톱 반만 한 파란 알약이 교육 개혁의 원동력이 된 것은 씁쓸했다. 토론 학습과 프로젝트식 수업, 다원적인 학생 선발, 종합적인 평가를 위한 논술과 구술 시험, 새롭고 유연한 진학 코스들을 설계하다 보니 초기에는 키메라 꼴이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저소득층 학생들의 진학률이 떨어졌고, 고소득층 자제들이 기세등등했다. 논구술 선생들은 고대 그리스 이후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문제가 없지 않았어도 주입식 교육과 객관식 시험엔 평등한 구석이 있었다고 사람들은 한탄했다. 한동안 많은 이들이 옛 시절을 그리워했지만, 이내 천천히 몸을 바꿔나갔다. 공교육은 한 번 제대로 죽었다가 살아났다. 끊임없이 낮아지고 있던 출생률이 아니었더라면 이 체질 개선마저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다. 비다시피 한 교실에서 학교는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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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이 조금 더 많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개 사랑이 바래는 것은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므로, 이제 잊히지 않는 기억들로 사랑은 유지되었다. 초혼 연령이 아주 약간 앞당겨졌으며 이혼율도 미미하지만 낮아졌다. 약을 삼킨 시간에 하필 크게 싸우는 커플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때 기억나?” 같은 말은 잘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서로 눈만 바라봐도 어느 때를 재생하고 있는지 아니까. HBL1238은 연인들의 약이 되었고 전혀 성적인 효과나 환각 효과가 없었음에도 ‘Hell of a blow job’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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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장에서 두 세대에 걸친 배우들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자 그렇지 않아도 얄팍했던 이야기들이 더 얄팍해졌다. 자리를 떠난 배우들은 소극장을 빌려 언젠가 그들에게 주어졌던, 연기할 만한 가치가 있던 극들을 재공연했다. 파업을 시작한 배우는 어디서 끊어 말하고 숨을 쉬는지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객석의 관객들은 다시 배우들과 사랑에 빠졌다. 공간을 꽉 채우며 발산하는, 대단한 에너지에 매혹되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여성 배우들을, 중년과 노년의 배우들을 변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없이 대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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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 학자들이 “이런 것은 진짜 학문이 아니다”를 외치며 아무리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도 그건 진짜였다. 학설을 뒤집고 또 뒤집은 젊은 학자들은 원래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저 HBL1238이라는 도구를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에서 전 세대와 구분될 뿐이었다. 학계가 나아가는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따라잡는 데에도 알약이 필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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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약의 유일한 부작용은 부작용이 없는 것이었다.” 블라우 박사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사실은 크리스마스 쿠키인 스니커 두들이 먹고 싶다는 게 마지막 말이었지만, 제자들은 위의 말을 마지막 말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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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가 또 한 번 해결책을 찾았다고 안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무언가 더 남아 있을 거라는 미적지근한 예감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지구 곳곳에서 사람들은 비극을 잊었다. 살해 현장에서는 바로 파티가 열렸고, 대학살은 순식간에 정당화되었으며, 독재자의 자녀들이 적법하게 정권을 계승받았다. 똑같은 구호를 외치며 똑같은 테러를 저질렀다. 비극을 잊어버리는 시대의 전쟁이란 말할 것도 없이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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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전에는 이렇지 않았나요? 그 조그만 알약 전에는요? 끔찍한 일들이 없었다고 말해봐요. 그때도 사람들은 이 모든 참혹을 다 잊지 않았나요?” 패치 때문에 붉어진 어깨의 네모를 긁으며 건조한 얼굴로 묻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HBL1238도, 그 부작용도 그저 사소한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그전에도 거대한 회사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시에 망쳤고, 매번 해결책 대신 미봉책만을 택했으며, 사람들은 시대가 흘러가는 진행방향의 굵은 화살표 위에 앉아 불행의 원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괴로워하며 더 괴롭게 만드는 액체를, 고체를, 기체를 삼켰다. 작은 하늘색 알약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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