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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김은주



    찬찬히 살펴보면, 타자는 아직 인간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인간적 지평 너머의 잉여 경험을 가리킨다. 이러한 타자는 로고스가 설명하지 못하는, 그러나 거대한 힘을 지닌 괴물의 이미지로 세계에 등장한다. 유명한 신화들은 언제나 괴물을 목격하여 지혜를 얻은 자를 그린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욥과 레비아탄의 만남이 그렇다. 그들은 괴물을 가두고 자신에 관한 지혜를 얻지만 이때 괴물은 설명되지 않은 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결국 괴물에 대한 서사는, 사유와 지식의 한계를 그린다. 괴물은 지식의 한계 밖에서 출몰한다. 낯선 존재인 타자들은 언제나 괴물로 낙인찍힌다. 어떤 타자는 때때로 천사와 같이 신성한 괴물로 추앙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속죄양으로 전락한다.




    여성 철학자에 대해서 쓰면서, 이 오래된 질문을 떠올린다. 남성의 철학은 인간 전체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고한다고 당연히 여겨지지만, 여성에게는 왜 이 질문이 따라붙어왔는가? “여성주의 철학이 보편 학문이라는 철학의 입지를 유지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실상 세계 밖의 위치에서 진리를 보증하는 방식으로 보편적·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람일 뿐이다. ‘절대적 진리’가 허망한 환상이라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이미 목도했다.





    아렌트는 사유를 그저 원래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거나 계산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유는 다른 이와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며, 비판의 능력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사유에 의지해 사실을 탐구하면서 진실을 바로 보고자 했다.





    아렌트가 이 책에서 밝힌 악의 평범성(Banality)은 악이 ‘별것 아니다’라는 뜻이 아니다. 악행이 자행되는 것은 누군가가 대단한 악인이라서가 아니며, 우리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 역시 어떤 조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에서 드러난 악의 평범성은 관료제와 전체주의 속에서 누구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내며 파시즘의 민낯을 폭로한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통찰은 이후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스탠퍼드 교도소에서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을 통해서 입증된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사고의 무능성과 그에 따른 행동의 무능함이 도처에 자행되는 악을 야기한다고 결론짓는다. 악은 비범한 형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인식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하는 체제가 사람들을 순응하게 만든다. 이러한 통제의 체계가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종 학살과 같은 범죄에 가담하게 하고 학살에 무관심하게 한다. 인간 사유의 무기력에 기댄 파시즘은 인간의 사고를 체계 순응적으로 길들이고, 최종적으로 사람을 억압적 체계에 동참하게 하면서 악의 실행자로 만든다. 유대인 동포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아렌트의 통찰은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을 진단하는 데도 유의미하다. 학살의 피해자였던 유대인이 그토록 원하던 이스라엘 건설 후, 원 거주민인 팔레스타인에게 그 어떤 민족보다도 잔혹하게 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퍼붓는 폭격을 오락처럼 지켜보는 이스라엘 보수파의 자가당착적 상황은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내포한 의미를 다시금 반추하게 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사숙고하는(réfléchir) 것이다.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된다.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겠다.





    나는 평생 그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을 ‘사랑’한 적이 없다. 독일인이건 프랑스인이건 미국인이건 아니면 노동계급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친구들만을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이다.





    스피박은 영어판 『그라마톨로지』 서문에서 지배 담론이 지니는 억압성과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해 데리다의 해체 전략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해설하면서, 비서구 문학과 언어 및 목소리에 관한 논의로 향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지식은 동일성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바를 초과하는 것이다. 세계는 세계를 알고자 하는 주체에 의해 다 파악되거나 재현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구의 시각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차이로 가득 찬 세상을 보편화하고 일반화했다. 스피박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를 가로지르면서 이러한 오만한 서구의 거대 담론과 지배 담론에 저항한다.





    스피박이 콜카타로 잠시 돌아왔을 때의 일화가 있다. 그때 그는 최신 유행으로 짧게 자른 소위 페미니스트 스타일이라 불리는 커트 머리였고, 두 번째 이혼 후 새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스피박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보거나 업신여겼다. 그의 헤어스타일과 너무 큰 키 그리고 옷차림 때문이었다. 인도인들의 시각에 짧은 머리는 과부를 상징했고, 너무 큰 키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 불가능한 망측함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스피박의 옷차림은 가난한 사람들이 할 법한 형편없는 차림새로 여겨졌다. 스피박은 머리 모양, 체형, 옷차림 등이 문화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사례로 이 일화를 이야기한다. 인도에서 인정받는 결혼의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스피박의 여동생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남자는 총명하고 친절하고 선량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지만, 인도의 신분 제도에서 스피박의 동생보다 위치가 낮았다. 그들은 분명 결혼을 했지만, 인도에서 여성이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도의 기준에서 그들의 결합은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스피박의 여동생은 기혼자였지만 인도에서는 미혼자로 대우받았다.





    내가 이해하기로 인간은 개입하려면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23년간 가르치면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입장이 약하면 약할수록 더욱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담론에 의한 교섭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대등한 자끼리의 교섭이나, 단체교섭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서양의 자유주의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면, 서양 자유주의의 속박의 내부에서 그것을 열어가면서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짊어질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교섭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구조에 개입해야 된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가장 교섭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에 정착할 때까지도 개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자신을 그들의 기준에 맞춰 ‘제3세계 여성’이라 부르지 말라고 요구한다. 권력이 집중된 서구 세계를 선망해 자신의 출신과 인연을 끊고 서구에 편입되고자 한 속물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이른바 ‘제1세계’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에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서다.





    스피박은 특히 소위 서구의 지식인들이 서발턴들을 말하는 것이 결국 서구의 시각에서 붙잡은 재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단일하고도 매끈한 타자로 재현된 제3세계의 민중은 서구 주체의 욕망이 만든 허상이다. 서발턴은 결코 투명한 존재로 재현될 수 없다. 서발턴으로 단일하게 호명되는 존재들 사이에는 흐르는 균열이 존재한다.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는 ‘재현’과 ‘대표’를 포괄하는 다의성을 지녔다. 두 개념은 동일하지 않다. 첫 번째로, 재현은 어떤 실재를 관념이나 표상으로 ‘다시 제시하는 것(re-presentation)’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단어는 ‘대표하기’를 뜻한다. 푸코와 들뢰즈는 재현과 대표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유럽의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억압받는 타자들을 투명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인도를 지배한 영국 제국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티는 비문명적인 야만이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관습은 여성의 자살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비틀린 산물이며, 여성은 인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다. 이것이 ‘여성 자신의 숭고한 선택’으로 포장될 때,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섰다고 묘사된 자유로운 선택 주체 혹은 비문명과 가부장제의 가여운 희생자인 과부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스피박이 착목한 지점은 여기다. 과부의 목소리와 마음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침묵 속에 놓여버린다. 사티에 처한 인도 여성을 대신하여 말하고 그들의 입장을 재현하고 전달해주는 지식인들의 행위와 입장만이 남을 뿐이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프라이데이는 타자에 대한 서구식 환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가 표류한 섬의 원주민으로서 이후 크루소의 충실한 하인으로 거듭나는 존재로 묘사된다. 디포의 소설의 배경은 ‘무인도’이고, 여기에 ‘인간’은 이곳에 사고로 불시착한 크루소뿐이다. 식인종인 원주민은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이 아니다. 디포는 막 탄생한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최초의 인간처럼, 자신에 의해 새로 생명을 얻은 원주민에게 이름을 준다. 그들이 만난 것이 금요일이었기에, 로빈슨 크루소의 달력에 따라 그는 ‘프라이데이’가 된다. 그가 크루소와 만나기 전에 불렸을 이름은 지워진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쉽게 읽히는 글의 기만성이다. 쉽게 읽히는 글은 이미 우리가 복종하고 있는 문법과 사상 그리고 문화를 내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를 잊고, 글을 읽고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러한 쉬운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된 낡은 집단 안에 깊이 묶여버려, 새로운 사고와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이성애 제도에 근간한 이원적 젠더는 자신의 젠더가 여기서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감추면서 비정상으로 몰아세운다. 이는 이성애의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이성애적인 모티프로 해석하면서 차별과 폭력을 낳는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가 예시한 19세기 에르퀼린 바르뱅의 비극적 삶은 이러한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이차성징을 겪으면서 남성성이 발현했고, 공청회와 의료 검진에서 남성이란 판별을 받게 된다. 이후 바르뱅은 연인과 직장을 동시에 잃고 떠돌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실재하는 어떤 근본적 속성이 아니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이원적 젠더 체계는 허구적이다. 이 점에서, 레즈비언 용어인 부치나 펨은 이성애적 남성성을 모방한 ‘남자 같은 여자’나 이성애적 여성성의 단순한 모방본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근원적으로 설정한 젠더 이원론이 허구적이다.





    즉 젠더를 수행성으로 이해할 경우에, 누군가를 여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가졌다는 의미보다는 당대가 이상적 여성성이라 여기는 규범적 특질을 지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이상적 여성성은 담론에 의해, 문화와 정치의 영향 속에서 형성된다.





    버틀러는 여성의 범주가 어떻게 생산되는지와 관련해 페미니즘적 주체가 전제한, ‘하나의 여성’이라는 보편적·통일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단 하나의 여성을 주창할 경우 여성은 가부장적 남성의 반대 항으로 기능하게 되어, 비판과 저항을 한다 해도 가부장제의 구속장 안에 갇히게 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의미의 평등권을 주창하는 것 또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능력과 위상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방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혹은 이를 거부하고, 여성만의 특질로서 감성, 모성, 수동성을 훌륭한 위상으로 치켜세우는 방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결국 인간의 기준은 계속 남성인 채로 지속되어 여성은 명예 남성으로서 인간이 되거나, 그 인간 남성에 저항해 그 인간 남성에 의해 ‘결핍’이라 불리는 ‘여성적’ 특징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빠지거나 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버틀러는 수업을 하고 있고,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과 함께 살고 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지내온 버틀러와 브라운은 버틀러가 전 남편과 낳은 아이 이삭을 함께 키웠고, 성년이 지난 이삭은 현재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삭이 어렸을 때, 여자 둘이 부부인 우리 가족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삭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





    기존의 영장류 연구자들은 북반구의 산업 국가 출신이었고, 그들이 연구하는 원숭이들과 유인원들이 사는 장소는 이전의 식민지였다. 이는 영장류학이 애초부터 식민주의와 인종·국가 담론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사적·공적 영역을 구분하고 공적 영역에 헌신하는 것을 찬탄하는 관행의 뒷면에는 과학자들의 실험에서 전적으로 여성을 배제한 사실이 존재한다. 이런 가운데 전개된 서구 과학이 이성과 과학을 남성의 전유물로 독점하고 여성을 이성이 없는 존재로 전형화·배제해왔음을 해러웨이는 지적했다. 그는 서구 과학의 이런 남성중심주의를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Dead White European Males)”이라는 표현으로 풍자한다.





    해러웨이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황적 지식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참인 것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한계 인식을 포함하는 지식이다.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며 상황적이다. 오히려 인식의 객관성은 자기 지식의 부분성과 상황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연원한다. 이 지식 모델에서 해러웨이는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상황적 지식이란, 겸손한 목격자의 지식이다. 해러웨이는 말한다.





    삶의 조건인 중력에 짓눌려 허무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그때, 중력의 삶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지구에서 자식을 잃은 뒤 무중력의 우주를 떠돌고 싶어했던 것처럼, 중력의 삶이 버거운 인간은 중력장 밖의 세계에서 의지할 가치를 찾으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몬 베유는 무중력에 난파하여 떠돌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베유는 잔혹한 삶의 조건을 사유하면서도, 그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한다. 「그래비티」의 주인공도 결국 지구의 가장 추운 땅에서 들리는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에 삶의 의욕을 되찾고, 중력의 삶으로 귀환해 기쁘게 물과 땅을 두 발로 딛는다.





    베유는 고등사범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소르본에서 나와 똑같이 자격증을 따고 있었다. 당시 중국이 극도로 황폐하고 인민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그는 벌써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가 전 세계의 정의를 위해 고동칠 수 있는 심성을 지녔다는 것에 감탄했다. 어느 날 나는 그와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단호한 어조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이며,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 이 세상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는 사람이 그저 생존하게 될 뿐이지 행복하게 될 수는 없다고 말하자, 시몬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당신은 아직 배를 곯아본 적이 없군”하곤 입을 닫아버렸다.그런 뒤로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나를 ‘잘난 체하는 소시민’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좀 괴로웠다.  
    진실한 우정을 나누기에는 서로의 기질과 관심이 달랐지만 보부아르 역시, 사람들의 고통에 사심 없이 공감하고 헌신하는 베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몬 베유는 그의 『노동일지』에서 작업량, 임금 그리고 그에 따른 심리적, 정신적 박탈감을 자세히 기록했다.  
    “몸은 축 늘어지고 머리는 사고를 잃게 된다. 가슴에는 서글픔과 분노와 무력감 그리고 굴욕감이 고인다. 유일한 희망은 내일도 이렇게나마 일할 수 있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자처하고 고된 노동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는 만족스럽게 적는다.  
    “이제 나도 추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좋든 나쁘든 간에 선의와 악의를 두루 갖춘 현실 속의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자신을 소진하는 인간의 현실을 그는 ‘뿌리 뽑힘’이라 표현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내 영혼과 살 속에 파고 들어왔다. 그 어떤 것도 내게서 그 고통을 떼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과거를 완전히 잊었고, 미칠 듯한 피로 때문에 살아날 가능성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전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서 나는 영원한 노예의 낙인을 받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노예로 여기게 되었다.





    당대의 과학 지식을 수용했던 베유는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에너지 역시도 중력의 법칙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외부의 에너지에 의탁하여 삶을 영위한다. 인간에게 외부의 에너지는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며,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외부의 에너지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중력의 법칙은 특히 인간이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인간에게 있어 정신적 에너지의 근원은 육체적 에너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외부에 있다 (…) 궁핍하여 굶주렸을 때 인간은 먹을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연쇄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고통의 발생은 우발적이고 운명과 무관하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더 괴롭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더 잔혹한 사실은 통치 체계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면서 권력의 유지와 지위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베유는 이렇듯 “고통을 서로가 서로에게 넘기는 사회”라는 속성이 사회가 안정되고 권력이 유지되는 조건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베유가 통찰한 영성은 신과의 일치와 그의 밝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이 깎아낸 파임과 거기에서 드러나는 빛이다. 처참한 불행의 상황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묻다가 삶이 추악해져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라고 묻지만 신은 대답이 없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은 정신이 산산조각 나서 끝없이 절규하다가, 허무에 도달할 뿐이다. 이 허무는 영혼 전체를 공포로 넘쳐흐르게 한다. 베유는 여기서, 이 공포 앞에서, 삶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시몬 베유의 이야기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중력과 은총 꼭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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