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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로스의 종말 / 한병철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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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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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을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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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 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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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데이터 저장 장치와 같은 기술 매체는 있었던 것에서 모든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을 폐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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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흥분된 눈 사이에서 일종의 수혈이 이루어진다. "뮈리누스의 파이드로스와 그에게 반해버린 테베의 연설가 뤼시아스를 생각해보라. 뤼시아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파이드로스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파이드로스는 자신의 눈에서 튀어나오는 불꽃 광선이 뤼시아스의 눈을 향하게 하고 이와 함께 뤼시아스에게 생명의 기운을 보낸다. 이렇게 서로 눈이 마주치는 가운데 파이드로스의 광채가 뤼시아스의 광채와 쉽게 하나가 되고 마찬가지로 한쪽의 생기가 다른 쪽의 생기와 결합한다. 파이드로스의 심장에서 생겨나는 생기의 연무는 즉시 빠른 속도로 뤼시아스의 심장을 향해 흘러가서는 심장 속의 단단한 실체를 통해 응축되어 다시 피로 변한다. 그러니까 본래 상태로, 즉 파이드로스의 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경이로운 과정이다! 파이드로스의 피가 뤼시아스의 심장 속에 있다니!" 고대의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안락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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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바 일루즈는 연구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오늘날 사랑이 "여성화"되고 있다고 확언한다. "상냥한", "친밀한", "조용한", "편안한", "달콤한", "부드러운"처럼 낭만적 사랑 장면의 묘사에서 사용되는 형용사들은 전부 다 "여성적"이다.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낭만주의의 이미지가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의 진단과 달리 오늘날 사랑이 단순히 "여성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락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자의 편안한 내재성, 편하게 늘어져 있는 내재성이다.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떤 초월성도, 어떤 위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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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 또는 건강한 체력과 구별된다.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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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아가 일루즈는 선택의 자유가 증가함에 따라 욕망의 "합리화"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한다. 욕먕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의 주체는 "철저하게 선택을 통한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타인에 관하여 무엇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소망할 만한 기준인지 숙고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상상이 고조됨에 따라 "남성과 여성이 파트너에 대해 가지는 바람도, 함께하는 삶의 전망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고 상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사람들은 "환멸"도 더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환멸이란 "상상의 악명 높은 하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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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G. 밸러드의 단편소설 『한낮 어스름의 지오콘다』에서 주인공은 눈병의 치유를 위해 바닷가 시골 별장에 들어가 지낸다. 일시적인 시력 상실은 다른 감각을 고도로 날카롭게 만든다. 또한 그의 내면에서부터 꿈 같은 이미지들이 떠오르는데, 그는 곧 그 이미지들을 현실보다 더 진짜라고 느끼면서 강박적으로 거기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거듭해서 파란 암벽에 있는 신비로운 해안 풍경을 떠올리고, 그런 환상속에서 어떤 동굴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올라간다. 동굴에는 신비로운 여자 마법사가 있다. 그녀는 그의 모든 욕망이 응축되어 있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붕대를 갈 때 한 줄기 광선이 눈 속으로 들어오자 그는 빛이 자신의 환상을 불살라버리는 것처럼 느낀다. 그는 곧 시력을 되찾지만, 그 대신 꿈 이미지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전한 절망이 그를 극단적 결단으로 몰고 간다. 그는 더 많이 보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찔러 못 쓰게 만든다. 이때 고통의 비명이 환호성과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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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학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데이터와 정보의 더미에 휩쓸려 이론과 사유에서 아주 멀리 떠나가고 있다. 정보는 그 자체 긍정적이다.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실증과학, 데이터를 비교하고 평균을 내는 게 전부인 실증과학은 강한 의미에서의 이론에 종언을 고한다. 그러한 과학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고, 해석학적이기보다 폭로적이다. 여기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 긴장이 없다. 그리하여 실증과학은 단순한 정보들로 해체된다. 정보와 데이터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오늘날 오히려 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소에 기여한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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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다한 알아두기에서는 아무런 인식도 산출되지 않는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다.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이다.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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