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동명의 노래 듣다가 이런 소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고...

사디즘의 어원이 사드 후작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미덕의 불운 사읽었던 사람답게 바로 구해서 읽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반엔 뭐야 사드는 재미나게 글 잘 뽑던데 얘는 지루하네; 싶은데 잘 견디고 나면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냐??? 하면서 웃겨 디비지기 일보직전 상태로 읽게 된다. 결말도ㅋㅋㅋㅋㅋㅋㅋ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훈적임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얻어터지다 말고 남녀평등을 적극 지지해서 독자를 벙찌게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록에 나온 계약서까지 꼭 읽어주십시오..... 전세계 사람들 모두 모피를 입은 비너스 읽어야 한다.... 

 

+)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요 책과 마담 보바리, 채털리 부인의 연인, 헨리와 준 등등 상당히 에로틱한 걸로 유명한 소설들 묶어서 레드시리즈를 냈던데 표지가 전부 예쁘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도 디자인에 확 끌려서 읽을 책 목록에만 추가하고 말 수도 있었는데 바로 질러버린 것임. 이북으로 샀는데 마음 같아선 종이책으로 다 모아버리고 싶을 정도.

 


 

 

“아!” 그녀가 대꾸했다. “우리 여자들은 사랑할 때에만 충실해요. 하지만 당신들 남자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충실하기를 강요하지요. 쾌락도 없는 헌신만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잔인한 건가요? 여자인가요, 남자인가요? 대체로 당신들 북쪽 사람들은 사랑을 너무나 심각하고 진지한 것으로 여겨요. 당신들은 순전히 쾌락만이 문제인 곳에서도 의무라는 말을 하지요.”

 

 

 

“내 원칙은 수천 년의 경험에 근거한 거예요.” 그녀는 흰 손가락으로 검은 모피를 만지작거리면서 조롱 조로 대꾸했다. “여성이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수록 남성은 그만큼 더 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성을 지배하려 들지요. 반면에 여성이 잔인하고 불충하고 게다가 남성을 학대하고 모욕적으로 가지고 놀며 동정 같은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여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또 숭배를 받을 수 있어요. 어느 시대나 늘 그래왔어요. 헬레네와 델릴라 시대부터 예카테리나 여제와 롤라 몬테즈에 이르기까지.”

 

 

 

“내가 볼 때 그리스 사람들의 밝은 관능은 고통 없는 기쁨이에요. 그건 내가 평생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이지요. 나는 기독교나 현대인들, 즉 정신의 기사들이 설교하는 그런 사랑을 믿지 않거든요. 자, 나를 잘 보세요. 나는 단순한 이단자보다 더 나쁜 여자예요. 나는 이교도예요.

그대는 사랑의 여신이 오래 고민했으리라 생각하나요,
안키세스가 아이다 숲에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을 때.

나는 괴테의 『로마의 비가』에 나오는 이 구절이 늘 너무나 좋았어요.
자연 속에는 ‘신들끼리 사랑을 나누었던’ 영웅 시절의 사랑이 들어 있어요. 그 당시에는 ‘눈길은 곧 욕망으로 이어졌고, 욕망은 곧 쾌감으로 번졌지요’.
다른 모든 것은 다 인위적이고 꾸민 것이고 가짜죠. 기독교를 통해서?그 끔찍한 상징인 십자가가 나는 늘 무서웠어요.?뭔가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 자연과 자연이 지닌 순진무구한 충동 속에 개입되게 되었죠.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싸움은 바로 현대인들의 복음인 셈이죠. 나는 그쪽에 서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현대 여성들, 그 불쌍하고 히스테리한 여자들의 팬이라는 말이군요.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남성을 찾아다니느라 남자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여자들 말이에요. 그런 여자들은 울고불고하다가 정작 자신들이 해야 할 기독교의 의무를 매일 등한시하곤 하지요. 그들은 상대를 속이고 속임을 당하고, 다시 또 상대를 찾고 선택하고 다시 차버리고, 그래서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상대를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하며, ‘나도 헬레네나 아스파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며 살 거야’라고 조용히 고백하기는커녕 늘 운명만 한탄하지요. 자연은 남녀 관계에 있어서 지속성 같은 것을 알지 못하지요.”

 

 

 

“친애하는 부인…….”
“말 좀 더 할게요. 여자를 무슨 보석처럼 숨겨두려고 하는 것은 남자의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아요. 성스러운 의식이나 맹세 그리고 계약 등을 통해서 우리의 덧없는 인생 중에서도 가장 변하기 쉬운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어요. 우리의 기독교 세계가 이미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어요?”

 

 

기독교의 결혼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여서 불멸의 개념까지 생각해낸 것은 정말 그럴듯해요. 하지만 나는 영원히 살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숨결과 함께 이승에서의 반다 폰 두나예프로서의 나의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나의 순수한 영혼이 천사의 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부르든, 아니면 나의 먼지가 모여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탄생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일단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될 터인데 뭣 때문에 단념한단 말인가요? 한 번 사랑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제는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계속 매여 있어야 하나요?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단념하지 않아요. 내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나는 그게 누구든 사랑하고 싶고 또 나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누구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요. 이게 추한 생각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내 매력에 빠져 고통을 겪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끔찍하게 즐거워하거나 아니면 나 때문에 초췌해져 죽어가는 한 남자를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못 본 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나는 젊고 돈도 많고 게다가 아름다워요. 그래서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앞으로도 즐겁게 쾌락과 향락을 위해 살 거예요.”

 

 

 

“제베린,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그녀는 소스라치듯 대답했다. “아직도 나를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가요? 나를 대할 때 진지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나도 그렇게 해줄 거예요. 하지만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나는 거만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 그렇게 해줘요. 아주 거만한 모습을 보여줘요. 폭군이 되어줘요.” 나는 극히 격앙되어 소리쳤다. “내 것이 되어줘요. 영원히 내 것으로 남아줘요.”

 

 

 

“온 마음과 온몸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려면 당신이 내 곁에 있어 당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해요. 그러니 나의 두 가지 이상형 중에서 하나를 택해줘요. 원하는 대로 해요. 나를 남편으로 삼든지 아니면 노예로 삼든지.”
“그거 좋군요.” 반다는 작은 눈썹을 힘껏 찌푸리면서 말했다. “내 관심을 끌고 또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완전히 내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적어도 소일거리로는 제격일 것 같군요. 내게 선택권을 준 것은 당신이 너무 성급한 거예요. 자, 그러면 선택할게요. 난 당신이 내 노예가 되어주었으면 해요. 당신을 내 노리갯감으로 삼겠어요.”
“오! 제발 그렇게 해줘요.” 나는 한편으로는 떨리고 또 한편으로는 황홀감을 느끼며 외쳤다. “결혼은 평등과 합의에 바탕을 두지만, 이와 달리 가장 강렬한 열정은 서로 상반된 것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거의 서로 적대적으로 마주 서 있는 양극이지요. 내 사랑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미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지요. 그런 관계로 보면 한쪽 사람은 망치가 되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모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모루가 되고 싶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무시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어요. 나는 한 여자를 떠받들고 싶어요. 그 여자가 나를 잔인하게 대해 줄 때만 그렇게 할 겁니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그렇게 박식한 얘기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반다가 말했다. “그런데 내게 모든 걸 다 들려준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모피 하면 당신은 뭔가 좀 특이한 것을 떠올릴 것 같아요.”
“물론 그렇지요.”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앞에서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고통은 내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줍니다. 포악함이나 잔인함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여인의 배신만큼 내 마음속에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어요. 바로 이런 여자, 추의 미학에서 생겨난 이 기괴한 이상형, 한마디로 프리네의 몸과 네로의 영혼을 합쳐놓은 듯한 이런 인물은 사실 모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어요.”

 

 

 

열 살 나던 해에 나는 순교자들의 전설을 다룬 책을 손에 넣게 되었지요. 지금 기억으로 당시 나는 그 순교자들이 지하 감옥에 갇혀 고통스러워하고, 석쇠에 눕혀진 채로 불에 태워지고, 화살에 맞아 몸이 벌집이 되고, 끓는 역청 속에서 삶아지고, 맹수들에게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두려움과 함께 실제로는 황홀감을 느끼며 읽었어요. 그들은 가장 끔찍한 고통을 마치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치러냈지요. 그 뒤로 수난이나 끔찍한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쾌감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여자에 의해 고통을 받을 때 말입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시적인 것과 모든 악마적인 것은 한 여성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여성을 정식으로 숭배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감각적인 것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보았어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성한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여자와 여자의 아름다움에서는 뭔가 거룩한 것을 보았어요. 무엇보다 여자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인 종족의 보존이라는 역할을 해내니까요. 나는 여성에게서 자연의 인격화된 모습을, 즉 이시스 여신을 보았어요. 그리고 남성에게서는 이시스 여신의 사제를, 노예를 보았어요. 그리고 나는 그 여신이 남자를 잔인하게 다루는 것을 보았지요. 자연이란 말입니다, 자기 시중을 들어주던 것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내동댕이쳐버리지요. 반면에 자연에 봉사하던 것들은 자연의 학대를 받고 자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쾌감을 주는 축복이지요.
나는 신혼 첫날밤에 힘센 브룬힐트에 의해 묶여 벽에 매달린 군터 왕이 부러웠고, 변덕스러운 여주인에 의해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꿰매진 상태에서 마치 사냥감처럼 쫓겨 다녔던 그 불쌍한 음유시인이 부러웠어요. 그리고 대담한 아마존의 여인 샤르카의 꾐에 넘어가 프라하 근처의 숲에서 사로잡혀 디빈 성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잠시 그녀의 노리갯감이 되었다가 수레바퀴에 묶여 깔려 죽은 기사 츠티라드가 부러웠지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 얘기를 더 들어봐요. 그 뒤로 나는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을 그린 이야기들에 탐닉했고, 그런 장면들을 다룬 그림이나 동판화 들을 즐겨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왕좌를 차지했던 잔혹한 폭군들, 이교도들을 고문하고 불에 굽고 죽이라 명령했던 심문관들, 세계사의 페이지 속에 육욕적이고 아름답고 폭력적으로 묘사된 모든 여성들, 이를테면 리부사, 루크레치아 보르자, 헝가리의 아그네스, 마고 여왕, 왕비 이자보, 술탄의 왕비 록셀란, 지난 세기의 러시아 황후들이 모피나 담비 외투를 입고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요. 당신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환상을 일깨워주었어요.” 내가 소리쳤다. “내 마음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환상을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환상이죠?” 그녀는 내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작고 따스한 손의 어루만짐을 느끼고 또 반쯤 감은 눈동자로 사랑스레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받으며 나는 달콤한 도취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랑하고 숭배하는 여인의, 한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 대가로 당신을 학대할 수 있는 그런 여자를 말이죠.” 반다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요, 내 몸을 묶은 다음 내게 채찍질을 하고 발길질까지 해대는 그런 여자죠. 그러면서 정작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죠.”
“그리고 당신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당신을 미칠 지경으로 만들고 당신이 그 운 좋은 연적과 맞서게 한 다음, 당신을 연적의 야수 같은 손에 내맡겨버리는 그런 간이 큰 여자겠죠. 안 그런가요? 마지막 장면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그래요, 우리 여자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혹시 당신이 이상형을 찾아냈을 때 그 여자가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게 나올지도 모르니.”
“내 이상형을 이미 발견한 것 같아 두렵군요!” 나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녀의 품에 파묻었다.

 

 

 

“좀 더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녀는 유쾌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무엇보다 당신의 진지하고도 사려 깊은 성격에 반했다는 사실을 숨긴 적은 없어요. 게다가 그처럼 진지한 남자가 내게 헌신하는 자세로 황홀하게 내 발치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자극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자극이 지속될까요?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다가 이어서 노예처럼 학대해요. 그러다가 궁극에 가서는 발로 걷어차고 말지요.”
“내게 싫증이 나거든 언제든지 발로 차버리세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고 싶어요.”
“내가 보기에 내 안에는 위험한 기질이 잠복해 있어요.” 우리가 몇 걸음 떼어놓았을 때 반다가 말했다. “당신은 자꾸만 나의 그 기질을 일깨워놓고 있는데, 사실 그게 당신에게 이로울 건 없어요. 당신은 쾌락적 욕망과 잔혹함과 오만함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법을 잘 알고 있더군요. 내가 그것을 직접 시도하여 당신을 나의 첫 실험 대상자로 삼으면 어떻게 할래요? 폭군 디오니시우스처럼 말이에요. 폭군 디오니시우스는 무쇠 황소를 고안해낸 사람을 직접 그 안에 집어넣고 불에 구워 보라고 하였지요. 그 사람 말대로 그 안에서 지르는 신음 소리나 죽을 때의 가르릉대는 소리가 진짜 황소가 울부짖는 것처럼 들리나 알아보려고요.
혹시 내가 여자 디오니시우스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제발 그렇게 되어줘요.” 내가 소리쳤다. “그러면 내가 상상했던 것이 실현되는 거니까요. 좋든 나쁘든 나는 당신의 것이니 선택권은 당신한테 있어요. 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운명이 나를 몰아치고 있어요. 악마처럼?무자비하게.”

 

 

 

그녀는 뒤로 한발 물러서며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다.
“넌 노예야!”
“주인님!”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가운 자락에 입을 맞춘다.
“마땅히 그렇게 나와야지.”
“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내가 좋은가?” 그녀는 거울 앞으로 가더니 흐뭇하고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다본다.
“미칠 지경입니다!”

 

 

 

“아, 멋진 여인이여!” 내가 소리쳤다.
“잠자코 있어, 이 노예야!” 그녀는 돌연 어둡고 거친 눈길로 쳐다보더니 채찍으로 나를 갈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다정하게 내 목에 팔을 두르고는 동정심 가득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내가 아프게 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한편으로는 당황한 것 같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한다면’이라고요?” 반다가 반복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녀는 뒤로 물러서더니 얼굴에 어두운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나의 노예가 되어 여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이 어떤 건지 한번 느껴보라고.” 그 순간 그녀는 나를 걷어찼다.
“자, 어때, 기분 좋으냐, 노예야?”
이어 그녀는 채찍을 휘둘렀다.
“어서 일어나!”
나는 일어나려 했다. “그거 말고.” 그녀가 명령했다. “무릎을 꿇으라고.” 나는 시키는 대로 했고, 그녀는 채찍으로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채찍질이 나의 등과 팔에 번개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채찍질이 떨어질 때마다 살이 에는 듯했고 계속해서 얼얼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나를 황홀케 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바로 내가 사모하여 언제라도 내 목숨을 내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녀의 손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는 얘기를 잘 새겨둬요. 사랑하는 여자를 함부로 믿지 마세요. 여자의 본성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여자들은 여자들을 옹호하고 숭배하는 남자들의 말처럼 그렇게 선하지도 않고, 여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렇게 악하지도 않아요

 

 

 

사랑은 미덕이나 이익 같은 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 그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이끄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발견한 상대의 장점이나 결점이 우리로 하여금 몸을 바치게 하거나 아니면 뒤로 선뜻 물러서게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이끄는 것은 달콤하고 멜랑콜리하고 신비로운 힘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저 그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떠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당신은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당신은 본모습보다 나쁘게 행동하고 있어요. 당신의 천성은 더없이 선하고 고상하잖아요.”
“내 천성을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녀는 내 말을 격하게 끊었다. “내 진짜 천성이 어떤지 당신은 앞으로 더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잔인해야 날 사랑한다는 얘기군.” 반다가 말했다. “자, 어서 가. 이제 지긋지긋해! 내 말 안 들려?”
그녀는 내 따귀를 한 대 후려갈겼다. 눈에서 불빛이 번쩍였고 귀가 먹먹했다.
“모피 입는 것 좀 도와줘, 노예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도왔다.
“정말 서툴기 짝이 없군.”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옷을 다 입자마자 내 얼굴을 한 대 후려쳤다. 나는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너무 아프게 했나?” 그녀는 그렇게 물으면서 손으로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하소연할 일도 아니지. 다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자, 내게 키스 한 번 더 해줘.”

 

 

 

우리가 와 있는 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밝고 감각적이고 웃는 세계다. 자연 풍경까지도 우리 고장과 같은 진지함이나 우울함의 요소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푸른 산등성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지막 하얀 빌라들에 이르기까지 햇살을 받아 밝은 빛으로 빛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심각하지 않고 우리보다 생각을 적게 하며 모두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남쪽 지방에서는 죽는 일조차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가시 없는 아름다움이나 고통 없는 사랑의 감정이 가능할 것 같다.

 

 

 

“이제 우리 사이의 게임은 끝났어.” 그녀는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부터 정말 심각하게 시작하는 거야, 이 바보야! 난 너 따위 인간을 조소하고 경멸해. 나같이 돼먹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여자한테 눈이 멀어 자신을 노리갯감으로 내놓다니! 넌 이제 내 애인이 아니야. 생사가 내 기분 여하에 달린, 노예일 뿐이야.
아직도 사람 볼 줄 모르는군!

 

 

 

“이제야 네 마음을 알겠군.” 그러는 사이에 그녀가 소리쳤다. “이렇게 한 인간을 마음껏 두드려 팰 수 있으니 정말 통쾌하군. 게다가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말이야. 아직도 나를 사랑하나? 아냐? 오! 완전히 만신창이로 만들어주지. 내리칠 때마다 통쾌해지니. 그래, 그렇게 몸부림쳐 보라고. 비명을 지르고, 신음 소리를 내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야.”

 

 

 

커피 쟁반을 들고 그녀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때 반다는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이 정말 아름답군요.”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고통을 겪으니 정말 더 그래요. 불행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베린! 아직도 날 사랑해요?” 그녀는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아직도 날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가슴에 확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쟁반이 뒤집어지면서 커피포트와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고 카펫 위에 커피가 쏟아졌다.

 

 

 

지금의 그녀는 엄하고 변덕스러운 주인마님이 아니라 마음씨 고운 숙녀요 다정한 애인이었다. 그녀는 내게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최근에 출간된 책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 책들에 대해 아주 지적이고도 명확한 분석을 내놓으며 맛깔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문에 나는 너무나 황홀해서 몇 번이고 그녀의 손을 내 입술로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내게 레르몬토프의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내가 한참 열을 내고 있을 때 그녀는 조그만 손을 다정스레 내 손 위에 얹고서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지금 행복해요?”
“아직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서 천천히 재킷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나 나는 반쯤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얼른 흰담비 모피로 가렸다. “당신은 나를 미치게 만드는군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이리 와요.”
나는 어느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녀는 내게 뱀과 같은 혀로 키스를 해댔다. 그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행복해요?”
“이루 말할 수 없이요!” 내가 소리쳤다.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째지는 듯한 사악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소름이 좍 끼쳤다.
“전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 노리개가 되겠다고 꿈꾸더니 이제 와서는 자유인, 남자, 내 애인이 되겠다고? 이런 바보! 내가 손짓 한 번만 하면 넌 다시 내 노예야. 무릎 꿇어!”

 

 

 

그때 날렵하게 생긴 야성의 가라말을 타고 한 젊은이가 달려온다. 그는 반다를 보자 말의 속도를 늦춘다. 그는 이미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멈추더니 그녀를 지나가게 한다. 이번엔 그녀 역시 그를 쳐다본다. 암사자가 수사자를. 둘의 눈빛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그가 지닌 마법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놀라움과 황홀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삼킬 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을 보자 나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신 앞에 맹세하지만, 그는 대단한 미남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나는 그런 미남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대리석상으로 다듬어진 모습으로 벨베데레에 서 있다. 그와 똑같이 몸매는 날씬하지만 강철 같은 근육에, 그와 똑같은 얼굴, 그와 똑같이 찰랑대는 머리를 하고서. 그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은 바로 그가 민수염의 말끔한 얼굴이라는 점이다. 엉덩이가 홀쭉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남장을 한 여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입가에 어린 묘한 표정, 치아를 살짝 드러내주며 그 아름다운 얼굴에 뭔가 잔인한 인상을 남기는 사자 같은 입술…….
마르시아스19)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 아폴론이라고나 할까.
그는 목이 긴 검은 장화에 하얀 가죽으로 된 몸에 꽉 끼는 바지와 아스트라한20) 직물로 단을 대고 풍부하게 술 장식을 한 이탈리아 기병 장교풍의 검고 짧은 모피 재킷을 입고 있다. 검은 곱슬머리에는 붉은 터키모자를 쓰고 있다.
이제 나도 남자가 지닌 에로스를 이해할 것만 같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 앞에서 자신의 품위를 지킨 소크라테스가 존경스럽다.

 

 

 

“맛을 봐야겠군.” 그녀는 조롱 조로 대꾸했다. “이번에는 채찍보다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대답해주고 싶어. 너는 나를 비난할 권리가 없어. 나는 너한테 언제나 솔직하지 않았어? 너한테 벌써 여러 번 경고를 하지 않았어? 나는 너를 진심으로, 아니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나? 내게 너의 모든 것을 맡기고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네게 비밀에 부쳤었나? 아니, 내가 오히려 한 남자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비밀에 부친 적이 있었나? 그런데도 너는 내 노리갯감이 되고 싶어 했어, 내 노예가 말이야! 잔인하고 거만한 여자의 발길질과 채찍 맛을 보는 게 네겐 최고의 기쁨이었어. 자, 이제 뭘 원하는 거야?
내 안에는 위험스러운 소질들이 잠들어 있었어. 그런데 그것들을 깨워놓은 게 바로 너야. 지금 내가 너를 괴롭히고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오로지 네 책임이야.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놓은 것은 너니까. 나를 비난하려 들다니, 넌 아직도 남자답지 못하고 유약한 형편없는 인간이야.”

 

 

 

피렌체에서의 그날 밤으로부터 삼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나는 감히 당신께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었다고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때 당신은 당신의 그 환상에 젖은 헌신적 태도와 미친 듯한 열정으로 내 사랑을 질식시켜버렸지요. 당신이 나의 노예가 된 순간부터 당신이 결코 내 남편이 될 수 없음을 느꼈어요.

 

 

 

여자란, 자연이 창조해낸 바대로 그리고 현재 남자들이 키우는 바대로 남자의 적이라는 것이지요. 남자의 노예나 폭군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동료가 될 수는 없어요. 여자가 남자의 동료가 되려면 권리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고 또 교육과 일을 통해 남자와 동등해져야 해요.
지금으로서는 망치냐 모루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밖에는 없어요. 내 스스로 여자의 노예가 되겠다고 나섰으니 난 참 바보였어요. 알겠어요?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가르침은, 남에게 채찍질을 당하겠다고 나선 자는 맞아도 싸다는 거지요.

 

 

 

책의 출간과 함께 자허마조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팬레터를 받았다. 그중에 아우로라 뤼멜린이라는 젊은 여인의 편지가 있었다. 같은 그라츠에 사는 여인이었다. 그에게 쓴 편지의 말미에 그녀는 ‘반다 폰 두나예프’라고 서명했다. 바로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냉정한 여주인공 이름이다. 그와 결혼한 그녀는 나중에 그의 사후에 출간한 고백록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남편의 잔인한 이상적 여성이 되기 위해 온종일 모피를 입고 채찍을 손에 들어야 했었던 고충에 대해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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