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 캐럴라인 냅

 

 

 

번역이 어설퍼서 읽기가 괴로웠다. 이런 어순이 훨씬 자연스러운데, 이런 단어를 쓰는 게 훨씬 적절할 텐데 왜 이따위로 옮긴 거지...? 싶은 지점이 군데군데 많았음.... 중학교 영어독해 문제집 해설서 보는 느낌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거라 흐린눈 하고 읽었지만 돈이 남아돈다면 그냥 원서 사서 읽는 게 낫겠다 (이거 다 읽고 지금은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출판한 모빠상 단편선 읽고 있는데 이건 번역 상태가 더 노답이다. 펭귄은 역시 디자인 보고 사는 거지...^^).

발번역과는 별개로 내용 자체는 요즘의 나에게 위안이 많이 되었다. 애써 부정하려고 했던 감정들, 인지는 했으나 쉬이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불쾌한 경험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 기분.

 

 

 

  옛날 옛적, 지구와 목성이 다른 만큼이나 르누아르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살던 시절 내 몸무게는 37킬로그램이었다. 스물한 살이었고 키는 162센티미터였으며 허벅지가 무릎보다 가늘었다. 표준 체중이 54킬로그램 정도이니 17킬로그램을, 그러니까 몸의 3분의 1가량을 깎아낸 그 일은 헤라클레스의 과업에 비견할 어마어마한 노력이자 삶을 뒤바꿀 정도의 노력이었고, 엄밀히 생각해보면 여자들만 하는 노력이었다.
  르누아르의 세계에서 여성의 욕구는 풍요롭고 왕성하고 강력한 것으로 그려지고, 여성 존재의 핵심은 쾌락에 깊이 맞추어진 감각적인 것으로 칭송된다. 나의 세계-의심의 여지 없이 지금도 존재하며, 집중의 강도는 저마다 다르지만 여전히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욕구는 아예 정반대의 의미를 지녔다. 육체는 위험하고 불온하며 그릇된 것으로 경험되었고 육체의 갈망들은 낱낱이 구분되었으며, 각각의 갈망에는 상충하는 여러 의미가 부여되었고, 갈망 하나하나가 부담스러운 의미의 짐과 심란함을 짊어지고 있었다. 두 세계의 이런 차이를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았다면 나는 ‘쯧쯧, 여자들이 뚱뚱하네’ 하고 생각했을 것이고, 두려운 마음 혹은 경멸하는 마음으로, 어쩌면 두 감정을 모두 느끼며 고개를 돌려버렸을 것이다.

 

 

 

욕구는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삶에서 풍요의 감각과 가능성을 느끼고자 하는, 쾌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더욱 깊은 수위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이 소망이 종종 유난히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 고통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자들과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 거기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러니까 기쁨, 육체 및 영혼과의 평화로운 관계, 넉넉함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그러나 흔히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갈망이 있다.

 

 

 

스스로 가하는 그 박탈에는 상쾌한 느낌을 주는 뭔가가 있었고 정화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3학년이었던 그해 가을과 겨울에 체중이 좀 줄었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체중을 줄이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어렴풋하게만 의식했다. 기억나는 건 대체로 초연한 호기심, 더 알고 싶다는 끌림 같은 것이다. 저녁을 건너뛰면 어떻게 될까? 낮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커피만 마시면 어떨까?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해.

 

 

 

어떤 느낌이 들었느냐 하면… 흥미로웠다. 그런 작은 의지력 시험들은 내가 갈망하는 듯한 것들, 이를테면 차분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강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 나를 남다른 존재로 부각시켜줄 수단, 어떤 목표의 윤곽 같은 것들을 안겨주었다. 밤이면 친구들과 한 번씩 캠퍼스 근처에 있는 술집에 갔다. 웨이트리스들이 맥주와 함께 커다란 소쿠리에 담긴 버터 팝콘을 가져다주는 곳이었다. 나는 팝콘은 먹지 않겠다고, 단 한 알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은밀히 내린 그 결단에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친구들은 소쿠리로 손을 뻗어 팝콘을 한 움큼씩 집어 먹고 웨이트리스에게 더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로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그렇게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라고 조금은 뿌듯해했다.

 

 

 

나는 전보다 적게 먹고 전보다 더 말라갔다. 다들 이런 변화를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우와, 너 너무 말랐어!” 하고 말하거나 “우와, 너 살 빠졌구나!” 하고 말했다. 나는 잘 몰랐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우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하지만 내 속에는 자그마한 자부심의 알갱이가 싹을 틔웠고, 내가 부러움이라고 이해한 그들의 그런 관심이 싹에 물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을 나는 그리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저울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고, 자신의 가치를 저울의 판단에 맡겼다. 하지만 내게 그건 그저 게임일 뿐이었다.

 

 

 

우리 모두 그 원칙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건 바로 사이즈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사이즈(식사량, 신체 사이즈, 욕망 자체의 크기)를 통제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식욕을 억제하는 것은 가치 있는 야망이라 여겨진다. 비록 그것이 다른 모든 야망을 덮어버리고 심지어 당신을 미치게 만든다 해도.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2킬로그램을 뺐고 거기서 2킬로그램을 더 뺐다. 나는 메시지를 흡수하고 부풀렸으며 그런 다음 마땅한 보상을 (“넌 어떻게 그렇게 날씬한 상태를 유지하는 거야?”) 받았다. 다른 여자들은 배고픔에 몸부림칠지 몰라도 나는 배고픔을 초월할 수 있었다.

 

 

 

또한 굶기는 새롭게 바뀐 풍경 속 내 위치에 대해 느끼기 시작한 불편함을 처리할 방법도 제공해주었다. 그러니까 내게 굶기는 갈망이라는 더 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흥정이었던 셈이다. 나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큰 존재가 되어도 된다(야심을 가져도 된다, 강력한 힘을 행사해도 된다, 경쟁에서 이겨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자신을 한 마리 굴뚝새처럼 작고 연약하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 불편함을 상쇄하려 했다. 또한 굶기는 역시 과장된 방식으로, 여성 전반에 대한, 특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그 일부는 내 가족에게서 물려받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문화가 뒷받침한) 감정들과 여성의 신체는 선천적으로 어떤 부끄러운 결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순순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 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한 전투가 다음 전투로 이어지고, 어떤 약속이 거짓임이 드러나면 또 다른 약속이 빛을 발하며 지평선 위로 솟아올라 별처럼 신호를 보낸다. 내 말 들어봐. 이 다이어트를 하면, 이 남자를 만나면, 당신의 몸과 집을 위해 이 물건을 사면 그 문제가 해결될 거야. 이는 제니 크레이그, 대니얼 스틸, 마사 스튜어트*가 각각 해석한 성배들이다.

 

 

 

남자들과의 강박적인 관계, 통제되지 않는 쇼핑과 빚, 삶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외모에 대한 집착, 온갖 종류의 ‘이즘’들. 이 모든 것이 허함과 관련되어 있고 내면의 공백을 잘못된 방향에서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있으며 모두 똑같은 어두운 감정에서 비롯된다. 많은 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감정은,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많이 원하거나, 너무 섹스나 야망이나 갈망에 치우쳐 행동하면 분명 그 청구서가 날아들고, 거기에는 대개 분노에 찬 자기 비난의 야유가 따라붙는다. 넌 돼지야, 게으름뱅이야, 형편없는 인간이야. 욕망 대 박탈, 탐닉 대 자제, 돌봄 대 자기부정. 이런 것들이 특히 여성의 드라마 무대에 반드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나는 이 욕구의 전선에서 누구 못지않게 자유롭고 권리가 있다고 느껴 마땅한 사람이다. 1970년대에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라는 진보적인 도시에서 성년이 된 나는 같은 세대와 이후 세대의 많은 여자들이 그랬듯 여성을 위한 전쟁은 이미 승리로 끝났으며 그 전쟁에 쓰인 무기들은 ‘페미니즘적 변혁’이라고 표시된 위대한 선반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는, 정치적으로 무지한 데다가 참으로 순진한 믿음을 갖고 사는 호사를 누렸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여성운동과 성혁명, 느슨해진 성 역할, 낙태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을 상속받았고, 그 유산은 여성의 욕망을 대단하리만큼 폭발적으로 열어젖혔다. 우리는 다른 어느 시대, 다른 어느 집단의 여성들보다 자유재량으로 쓸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더 많이 누렸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적합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해골 같은 형상으로 깎여나간 나 자신의 모습을 목도했다. 그때 나의 존재 전체는 욕구의 부인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흔두 살인 지금도 여전히 욕망의 주변부에서 머뭇대고 있는 나를 느낀다. 종종 나와는 어마어마하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문들의 틈새를 엿보면서, 그 안으로 호기롭게 들어가도 괜찮을지 어떨지 나는 아직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많은 행동(체중과 외모에 대한 집착, 명백한 자기 파괴적 성향)은 하나같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병이라고 치부된 후 ‘낮은 자존감’의 폐품 더미에 던져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항상 낮은 자존감이란 너무 빈약한 근거라고, 마치 넣어야 할 재료 중 열다섯 가지를 빼고 끓인 묽디묽은 수프 같다고 느꼈다. 자기 신체에 능동적으로 해를 입히거나 억지로 자신을 굴복 상태에 몰아넣는 여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연애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여자, 인사불성으로 쇼핑을 하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여자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은 초라한 자아상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말은 좌절된 욕구에서 배어나오는 슬픔과 허함을 단 한 방울도 포착하지 못하며, 엉뚱한 대상으로 치환된 욕구에 동반되는 괴로움도, 욕망들이 그렇게 여러 방향의 잘못된 경로로 흘러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어떤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또한 느껴야—할지 몰라서 겪는 고뇌도 좀처럼 포착하지 못한다.

 

 

 

또한 나는 이 감정이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칼로리 섭취량과 신체 사이즈에 관한 불안은 나에게나 수많은 다른 여자들에게나 여성의 자존감과 힘과 정체성과 관련된 훨씬 더 거대한 감정의 태피스트리에서 그저 몇 가닥의 올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기록으로도 잘 남아 있듯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의 집단적 정의에 변화가 일어나던 초기 단계, 아름다움이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너무나도 명백하게 날씬함과 연관되던 그 시기와 일치한다. 오늘날에는 이 정의가 전혀 새롭지 않다. 마른 몸매여야 한다는 내적, 외적 압박은 이제 너무 익숙하고 너무 널리 퍼져서 우리 대부분이 마치 공기로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그런 정의를 의식하지 못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지도 못한다. 평균적인 모델이나 배우나 미인 대회 참가자의 체중이 급락하기 전 (지난 25년 동안 그들의 체중은 여성 평균 체중보다 25퍼센트 더 낮아졌다)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 보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4, 식료품점 진열대에 저칼로리 제품과 ‘라이트’ 제품이 가득하지 않았던 세상, 마네킹이 엑스스몰이 아니라 미디엄 사이즈를 입던 세상,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이 그리 극심하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 않았던 세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때 남자들이 장악했던 영역(각급 학교, 스포츠, 직장, 침실)에서 여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여성을 어린애로 취급하고 수동적이고 연약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묘사하는 여성성의 이미지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로절린드 카워드가 『여성의 욕망』에서 썼듯이 “여성의 몸은 이 사회가 메시지를 쓰는 장소”8이며,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미국의 평균적 모델의 점점 줄어드는 실루엣에 점점 더 명료하게 새겨졌다. 너무 많이 갈망하지 마라, 너에게 주어진 한계선 밖으로 나가지 마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뷔페는 오늘날까지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데—내게 이 장소는 특히 미국적인 방식으로 가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많은 양과 과잉에 대한 강조는 미국 문화의 특질에 깃든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탐욕과 근시안을 반영하는 듯하다—그 공포가 시작된 것이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몸서리쳐질 만큼 어마어마한 양! 고삐 풀린 폭식의 가능성! 뷔페 테이블의 길이가 족히 1킬로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이쪽에는 주문 즉시 만들어주는 오믈렛과 베이컨과 소시지가 있었고, 또 이쪽에는 와플과 팬케이크와 크레페가, 저쪽에는 베이글과 머핀, 크루아상, 페이스트리가, 또 저쪽에는 각종 디저트와 케이크와 파이와 미니 수플레가 있었다. 만약 자기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혹은 부른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육체적 포만의 신호를 보내주는 내적 메커니즘이 고장 난 사람이라면, 음식이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잔뜩 품고 있거나 다른 갈망들의 대체물이 된 사람이라면, 이렇게 줄지어 선 음식들이 당신을 훅 무너뜨릴 수 있다. 나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적당하게 혹은 책임감 있게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배가 부르면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심지어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만족시킬지, 어느 정도가 나를 만족시킬지 안다고 할 만큼 내가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다 먹었다. 억누른 식욕은 언제나 의지력의 표면 바로 밑에서 사납게 날뛰고 있다. 그 시기에 자주 그랬듯 나의 억눌린 식욕은 그날도 나직이 달아오르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결국 끓어넘쳤다. 나는 먹었다. 계란과 베이컨과 와플과 케이크를 먹었고, 나중에 배가 터질 듯 아플 것이고 차오르는 역겨움에 넌더리를 낼 것임을, 내가 반드시 뒷감당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튿날은 종일 굶거나 10킬로미터를 달리거나 아니면 둘 다 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먹었다. 아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배가 아플 때까지 먹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압도적 다수—80~89퍼센트로 추정된다—가 매일 아침 자기혐오의 불안한 동요를 의식하며 잠에서 깨고, 스타킹을 끌어올릴 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바지와 스커트의 지퍼를 올릴 때 배와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착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여자들이 자기 몸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비율은 남자들의 세 배다. 여성의 80퍼센트가 다이어트를 한 경험이 있고 어느 순간에나 여성의 절반이 적극적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며 자기 몸이 늘 불만스럽다고 답한 이들이 절반이다.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문화가 매개한 현상이라는 것, (그 자체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 외모에 대한 여성의 몰두에 특유의 형태를 부여하고 유독 날씬함에 가차 없이 집중하는 성격을 띠게 만든 것이 문화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외모 전반에 대한, 특히 체중에 대한 불안의 전례 없는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그 엄청난 수치는 시각적 표상보다 더욱 복잡한 무엇이 작동하고 있음을, 권력과 유능함과 힘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의식이 아직 본능적 확신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권리와 자격이 본능적이고 영속적이며 실질적인 수준에서 느껴지려면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영역에 존재해야 하고, 더 폭넓은 차원에서 알려지고 인정되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들은 여전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지난 40년 동안 이뤄낸 그 모든 개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저 바깥세상을 거의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의회는 여전히 남자들이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 최상위 기업 경영진의 98퍼센트가 남자다. 오늘날 벤처 창업 투자금의 95퍼센트가 남자들의 은행 계좌로 흘러들어간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는 최고경영자 200명은 전부 남자다. 포춘 500대 기업의 리더 중 여자는 단 세 명이고 이 수는 20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남자들보다 덜 눈에 띈다. 우리 여자들의 삶과 의제와 관심사가 신문 1면 기사에서 다뤄지는 비율은 여전히 15퍼센트밖에 되지 않고, 막상 1면에 실릴 때는 대체로 우리가 범죄의 피해자나 범인일 때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수익력도 더 작다. 남자가 1달러를 벌 때 여자들은 여전히 84센트를 벌고 있으며, 아이를 낳기 위해 직장을 쉰 여자들은 심지어 직장에 복귀하고 6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 비해 17퍼센트 더 적게 벌고, 자녀가 있는 남자들은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반면 자녀가 있는 여자들은 가장 적게 번다.

 

 

 

오늘날 여자는 신경외과 의사도 될 수 있고 천체물리학자도 될 수 있다. 자기 의지에 따라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며, 배우자와 헤어지고 짐을 꾸려 대륙의 반대쪽 끝으로 이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들에서 한 걸음 더, 아니 두 걸음 더, 아니 열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을까? 단순히 천체물리학자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음식과 섹스와 쾌락과 찬사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완전한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강력하고 활기 넘치는 거물급 천체물리학자일 수 있을까? 나라의 반대쪽 끝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와 함께 여자란 원래 어떻게 보여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관한 뿌리 깊은 모든 감정을 떨쳐내고 떠날 수 있을까? 외적인 자유들은 케케묵은 내면의 수많은 금기들과 여전히 충돌할 수 있고, 여자는 아직도 가장 권한이 미약한 인구 집단이라는, 희미할지는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인식과 충돌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은 오늘날 욕구가 유독 큰 문제로 대두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욕구들은 가능성과 제약, 힘과 무력함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밀고 당겨지는 대단히 모호한 맥락 속에,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맥락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특히 원함에 관해 본받을 모범이 없거나,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허락이 없거나, 자신의 욕망이 타당하고 유효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의식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에 비해 원하지 않기는 훨씬 쉽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렇다. 나는 어설프게 굶기를 시도하기 훨씬 전부터, 코티지치즈를 얹은 쌀 뻥튀기를 처음으로 베어 물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욕구를 억제하고, 욕구를 다른 걸로 위장하고, 욕구를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형태와 형식으로 빚어내는 일에 관해 아주 많은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가족 휴가 중 칭얼거리거나 화를 터뜨리지 않게 되었고, 대신에 사춘기의 돌처럼 무감각한 침묵 속으로 물러났다.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아버지의 머나먼 거리감과 자기만의 몰두를 견뎌낼 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한 방에 함께 있게 될 때 납처럼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을 것을 예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만져주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사랑받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것임을, 나의 허기는 성적표에 A 마이너스, A 플러스라는 스탬프로 찍어 표시해야 하는 것임을 배웠다.

 

 

 

길리건은 소녀들이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고, 갈등을 피하며,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성장하면서 여성은 매력적이고 ‘참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명령을 학습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동일한 역학을 좀 더 삭막한 단어로 묘사했다. 보부아르는 여자의 인생에서 청소년기는 남자들이 모든 힘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힘은 복종하고 사랑받는 대상이 되는 데 동의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시기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썼다. “소녀들은 존재하기를 멈추고 보기를 멈춘다.

 

 

 

나는 이 생각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문화는 이미 억눌린 채 뜨겁게 이글대고 있던, 나 자신의 믿음, 판단, 바람을 불신하는 마음의 불씨에 부채질을 해서 불을 더 키운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 챙기며 공격적인 욕구들은 많은 소녀들에게 무서운 것으로 느껴지고, 특히 그런 특성들이 여자답지 않고 부적절하다는 믿음을 갖도록 길러진 소녀들에게는 더욱더 무섭다. 또한 수수께끼 같은 장막에 싸인 채 위험한 기미를 띠고 있는 욕구들, 당신을 식탁에 앉은 한 명의 외계인처럼, 오래 머물기에는 너무 무섭고 너무 외로운 행성의 궤도를 돌고 있는 외계인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욕구들은 한층 더 무섭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그림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론상으로는 아니었을지라도 실제로 그랬다. 가정의 영역은 어머니의 구역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일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존중했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일을 추구할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깊은 물밑에서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던 일은, 초기에 그토록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열정을 불태웠던 아버지가 알고 보니 다소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상화된 여성성의 아이콘 같은 존재로서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이때 아버지가 품은 이상적 여성상은 딱히 해리엇 넬슨이나 준 클리버를 닮지는 않았지만, 인간적 필요와 열정과 갈망의 전 범위를 모두 지닌 온전한 한 인간으로 존재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갑자기 폭발하는 일은 없었지만 한숨을 많이 쉬었고, 어머니가 ‘짜증이 난 상태’라고 다소 모호하게 표현한 때면 주방에서 물건들을 쾅쾅 소리 나게 다루었으며, 두통이 있다며 침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고, 그럴 때면 지쳤으니 절대 들어오지도 묻지도 말라는 기운이 문 뒤에서 뿜어져나왔다. 나는 어머니가 주기적으로 아버지의 동료들을 위해 칵테일파티에서 안주인 역할을 했던 것도 기억하는데, 어머니는 그 역할을 몹시 싫어하면서도 우아하게 수행해냈다. 점잖은 미소를 띤 채 집에서 구운 고기 파이와 크래커를 쟁반에 담아 나르던 여자. 거기에 따르는 수고(종일 먼지를 털고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고기 파이를 만들고 욕실을 문질러 닦고 작은 비누들과 타월들을 채워 넣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하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시에 암묵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그런 다음 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얼마나 피곤해 보였는지도 기억한다. 지금의 나는 그 뼛속 깊이 느껴지는 기진맥진함이 거의 전적으로 감정적인 피로였음을 안다. 그것은 사람이 주고 또 주고도 자신의 몫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분노 서린 피로다.

 

 

여성성의 복음은 본질적으로 자기부정을 설파한다. 그리고 그것은 식욕에 대한 여성의 경험 속으로 죄책감과 혼탁함의 느낌,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걸 도저히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 심지어 욕망 자체가 정의할 수 없이 막연한 것 혹은 부적절한 것이라는 느낌이 그렇게 쉽게 스며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어머니가 “자기희생의 표본” 같은 사람으로, 늘 자식들을 위해 살았고 언제나 접시에 담긴 고기 중 가장 작은 조각과 과일의 가장 멍든 부분을 먹었다는 30대 중반의 한 여성은 평생 자신의 욕망도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힘겹게 애써왔다고 말했다. 영화나 레스토랑을 고르는 것처럼 단순한 일에서도 깊은 혼란에 빠지고, “나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은 그냥 한마디로 잘못된 일”이라는 느낌이 뼛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온다고 한다. 38세의 또 다른 이는 자기 집안의 여자들에게 “욕망에 관한 공백” 같은 것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마치 욕망이라는 영역 전체가 한마디로 그들은 출입할 수 없는, 안개에 감싸인 장소인 것처럼. “남자들의 필요는 언제나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고 분명하게 울렸어요. 아버지는 일곱 시 정각에 저녁 식사를 해야 했고 일곱 시 정각에 저녁 식사를 했죠. 내 남자 형제들은 축구 연습을 하러 갈 차가 필요했고 축구 연습을 하러 갈 차를 얻어냈어요. 하지만 어머니와 이모와 고모 들에게는 자신의 필요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가리게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인 일이라는 느낌이 있었고, 그러니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나는 평생 여자들이 이 관념과 전투를 치르는 모습을 보아왔다. 직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내세우거나 자신이 봉급 인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논쟁하는 일을 괴로워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하는 만성적인 압박감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힘들어하는 모습, 혹은 남자들은 사과할 일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일들(의자에 부딪힌 일, 고기를 너무 익힌 일, 날씨)에 대해 자동적으로 사과하려는 충동을 억누르려 애쓰는 모습을 말이다. 이는 모두 학습된 행동이다. 그런 충동들이 생물학적 기반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보다 유전적으로 돌봄에 더 적합하고 덜 자기 본위적이며, 원래 수용하는 데 적합하게 배선되어 있고, 선천적으로 허기와 공격성을 더 적게 타고났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찰하고 따라 하는 것,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정신의학자 제시카 벤저민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비록 자신은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그런 자신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일이 너무 흔히 일어난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보통은 자기 자신보다 자녀들에 대해 더 큰 포부를 품는다고 하지만, 이런 일에도 한계는 있다. 자신의 고립 때문에 깊은 우울을 느끼는 어머니는 자녀가 걷거나 말하는 것에 열광할 수 없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어머니는 자녀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열망과 야망과 좌절감을 억누르고 있는 어머니가 자녀의 기쁨과 실패에 감정이입하며 공감할 수 없다.”2 바로 이 말이 욕구라는 수수께끼의 핵심에도, 착하고 예쁘고 상냥해야 한다는 명령과 더불어 여자아이들에게 새겨질 수 있는 더욱 미묘한 감정의 흔적들에도 더 가까운 것 같다.

 

 

 

킴 처닌은 『허기진 자아』에서 여자는 딸로서 자신의 인생이 반드시 자기 어머니의 인생을 반영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지적한다. 어머니가 꿈을 이루지 못했거나, 무력했거나, 어머니나 아내 역할 외의 모든 정체성을 박탈당했거나, 스트레스나 좌절감으로 피폐해졌다면, 딸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내릴 선택들을 고려할 때 견딜 수 없는 갈등에 직면한다. 어머니에 대한 의리와 “새로운 여성 존재”가 되고자 하는 전념의 양극단 사이에서 괴로운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처닌은 이렇게 썼다. “성년이 되고 세상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딸은 [어머니의] 부러움과 질시를 불러일으킬 위험에 처하는데, 그보다 더 나쁘고 더 고통스럽고 생각하기도 심란한 점은 이제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 자신의 실패와 결핍을 상기시키는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 처닌은 이 딜레마가 식사장애에서 핵심적이며, 여자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그 공격은 “어머니에 맞선 쓰디쓴 전쟁”을 은폐한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이자 표현할 수 없는 감춰진 분노다.”

 

 

 

딸이 어머니에게서 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아무리 신중하게 내디뎌도 혹은 아무리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도 모두가 달콤씁쓸하며, 거의 감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리고 처한 상황은 다양해도 이는 아주 많은 여자들에게 해당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과 직업 사이에서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여자들, 아이들보다 경력을 더 중요한 것으로 선택한 여자들, 자신의 갈망과 가족의 갈망, 친구들의 갈망과 동료들의 갈망까지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갈망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여자들, 어쩌면 열 명 혹은 열다섯 명의 갈망이 포함되어 있을 필요의 뭉치에서 자신의 갈망을 조심조심 분리해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들. 만약 당신의 어머니가 집 밖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언제나 당신을 위해 있어주었다면, 만약 어머니의 존재의 핵심을 정의하는 것이 가족이었다면, 그런 어머니와 달리 당신은 가족의 삶을 절충했거나 완전히 내팽개쳤다면, 혹은 감히 그 이상을 원한다면 어떻게 자신이 실패자나 배신자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만약 당신의 어머니가 자신의 직업을 위해 하루에 12~14시간을 일하고 그러면서도 집안 살림까지 용케 꾸려내고, 당신의 숙제까지 도와주고, 축구 경기에 태워다주고 데려오고, 납부해야 할 돈을 지불했다면, 당신이 어머니가 했던 것보다 덜 하기를 원하거나 더 쉬운 것을 원할 경우 어떻게 자신을 이기적이거나 부족한 존재로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몸은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것 같았고 고통이 느껴졌지만, 또 너무 급히 일어서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투지 넘치고 강인하며 잘 집중하고 있다고 느꼈고, 통제 면에서는 조금도 봐주는 구석이 없었고, 통제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이것이 여자들의 허기, 감춰진 허기, 갈등하는 허기, 금지된 허기였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끝없는 허기였고, 섹스와 만족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기, 보이고자, 알려지고자, 먹여지고자 하는 허기, 취하고 또 취하고자 하는 허기였다. 나는 그 허기를 정복했고, 그것을 지배했으며, 밧줄로 수소를 잡아매듯 꽁꽁 잡아맸다.

 

 

 

나는 나 자신의 육체라는 대륙의 지배자, 쾌감 상실anhedonia의 여왕이었다.

지방 없음. 튀어나온 살집 없음.

피 없음. 새어 나오는 액체 없음.

아무 필요 없음.

이 얼마나 기이한 감각인가. 육체와 자신을 향한 가장 심층적인 적대 행위인 거식증을 자랑거리로 느낀다는 것.

 

 

 

사실 그보다 더 기이한 것은, 육체에 대한 이런 시각에 그리 유별난 점이 없다는 것, 외형과 모양에 대한 이 철저한 점검에, 잠재적 과잉에 대한 기저에 깔린 염려에 그리 특기할 만한 점이 없다는 것이다. 과장된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여성의 목소리 중 한 부분이다. 하나의 언어로서 육체 혐오. 날카로운 동사들과 독을 품은 명사들.
난 내 몸이 싫어, 내 허벅지가 싫어, 난 너무 많이 먹어. 내가 돈을 그렇게 많이 썼다니 믿기지가 않네. 몇 주 동안 헬스장에 한 번도 안 갔어,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정말 멍청해, 난 그냥 똥 덩어리야. 내면에서 펼쳐지는 이런 종류의 장광설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고 모욕적이어서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독백은 너무나도 흔하고, 너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얼마나 혹독한 말인지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냥 튀어나온다. 거울 앞에서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으윽’, 보기 싫은 머리, 완벽하지 않은 피부를 두고 매일같이 갈기는 자아를 향한 채찍질, 탈의실에서 들리는 역겨움의 자인, 나 좀 봐,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야. 상태가 나쁜 날에는 구체적인 것(허벅지, 배)에 대한 미움이 자신에 대한 미움과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는 듯 서로 구별도 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청바지의 지퍼가 자기 머릿속에 있는 오디오 테이프를 작동시키는 것 같다고 했다. 청바지가 너무 꽉 조인다고 느껴지면 테이프가 딸깍 작동한다. 이 돼지야, 넌 지지리도, 지지리도 뚱뚱한 돼지야. 또 다른 이는 폭식증 시기 사하제를 남용하던 때에 쓴 일기 한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그는 이렇게 썼다. 난 그냥 역겨운 짓만 하는 게 아냐, 내가 역겨운 인간인 거지, 나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역겨워. 매일 밤 이 알약들을 삼키고 이튿날 아침이면 거기 내가 있어. 글자 그대로 그냥 똥이야.

 

 

 

일리노이대학 시카고 캠퍼스의 철학 교수 샌드라 리 바트키는 여자들이 느끼는 항상 관찰당하고 있다는 느낌, 너무 깊이 뿌리내려 있어서 거의 제2의 자아처럼 느껴지는 냉철하고 비판적인 “익명의 규율의 힘”에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바트키는 이것이 매우 만연한 느낌이라고 확신한다—에 관한 글을 썼다.1 규율은 아주 적절한 단어다. 거식증에서 벗어나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와 별개인 어떤 힘에 대한 의식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심판하는 어떤—나이기는 하나 정확히 나는 아닌—존재가 내 정신의 한구석에 계속 살면서 지켜보고 있고, 항상 몸을 의식하고, 항상 형태와 중량과 몸선의 모든 미묘한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최악을 예상하며, 게으름이나 나태함이나 느슨해진 통제의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언제라도 따귀를 날릴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때로 그 목소리는 상황을 예상하고 앞서간다. 그 브라우니 먹지 마, 한 번 더 떠먹지 마, 그러면 네가 기특하게 느껴질 거야, 단호하고 날씬하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징벌적이고 냉소적인 경멸의 목소리일 때가 더 많다. 그 배 좀 봐라, 그 허벅지 좀 봐. 넌 암소가 되어가고 있어.

 

 

 

여러 해 전, 직장에서 회의를 하던 중에 한 남자 편집자가 내게 펜을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펜을 건네주고는 가만히 앉아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펜을 받아 뭔가 글을 쓴 다음 내 펜을 자기 귓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귓구멍에 찔러 넣은 펜을 빙빙 돌리더니 다시 빼서 펜을 들여다봤다. 그런 다음 다시 귀에 쑤셔 넣고, 다시 빙빙 돌리고, 다시 꺼내 더 살펴봤다. 내게는 그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어서—꼭 집어 말하자면 창피함을 모르는 것처럼 보여서—그 주제에 관한 칼럼을 써서 남자들이(적어도 일부 남자들이) 공적인 자리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하지만 여자라면 거의 절대 하지 않을 일들, 예컨대 운전하면서 코 파기, 화장지 없이 코 풀기, 가래 뱉기, 남들 있는 데서 트림하기 등에 관해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나는 이 칼럼에 “상스러운 남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예의범절이나 몸가짐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비난이나 판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 관한 글이었다. 바트키 역시 자신이 말하는 “규율의 힘”을 “여자들 대부분의 의식 속에 살고 있으면서 판옵티콘처럼 모든 걸 볼 수 있는 남성 감식가”라고 칭하고 “여자들은 항상 그의 시선 앞, 그의 판단 아래 놓여 있다”고 했다.2 만약 이 감식가가 남자들의 내면에도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존재는 여자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자들을 성가시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남자가 조깅을 하다가 길에 커다란 가래 덩이를 뱉는 장면을 목격한다 해도, 그 존재는 (혹은 그 남자 본인은) 적어도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당신이 이를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해 무시해버리더라도, 이런 내용은 내면에 스며들고 당신의 마음에 들러붙는다. 여신이 항상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넘어설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엘처럼 환희의 빛에 감싸인 모습으로만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여신은 카메라를 향해 입술을 삐쭉이며 오만한 미소를 짓는다. 희미하게 우월감을 드러내는 제스처로 턱은 위로 치켜들고, 얼음 공주 같은 눈은 섹시한 동시에 비웃는 눈빛, 남자들을 유혹하는 동시에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퍼붓는 눈빛을 보낸다. 이런 표현은 단순히 여자들에게 자신의 체중과 피부와 머리카락에 대한 자기모멸만을 촉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기모멸을 외현화하여 몸과 얼굴을 부여하고, 내면의 자기모멸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시각적 모욕을 끊임없이 날린다. 나를 봐. 여신이 말한다. 나에 비해 넌 너무 뚱뚱해. 넌 절대 나 같은 머리카락은 갖지 못할 거야. 넌 절대 나만큼 욕망을 일으키지 못해. 휠록칼리지 교수 게일 다인스가 표현한 대로 “그 눈빛은 남자들에게는 ‘나랑 자자’라고 말하고, 여자들에게는 ‘너는 꺼져’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모욕의 따귀를 맞고, 끊임없이 완벽함의 기준에 빗대 측정되면서 여자는 어느새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상실한다. 여신이 여자의 인식력에 계속 망치질을 해대기 때문이다. 나는 매주 헬스장 탈의실에서 평범한 여자 대여섯 명의 나체를 본다. 대개는 같은 사람들의 몸이다. 그리고 사이사이 텔레비전과 광고판, 광고에서 말 그대로 여신 수백 명의 몸을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주가 달이 되고, 해가 되고, 10년이 되면서—현실은 잠식되고, 이상적 육체가 평범하게 보이고 평범한 육체는 볼품없고 미학적 기준에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아름다운 몸과 평범한 몸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넓어지고 뚜렷해진다. 이것이 바로 그저 거울 앞을 지나가거나 상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단박에 비교와 비판의 경보음이 울려대는 이유다. 번쩍, 여기 불룩하잖아. 번쩍, 저기 결점이 있잖아. 번쩍, 불완전한 머리카락, 불완전한 피부, 불완전한 가슴, 불완전한 배, 불완전한 다리. 번쩍, 엘 맥퍼슨이 아니잖아. 이것은 또한 그 여신이 그렇게 자아를 두들겨 패는데도 유혹적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다.

 

 

 

이보다 더 음흉한 무언가도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광고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사유를 보여주는 평론가 진 킬본은 이미지들—특히 너무나 쌀쌀맞게 열정과는 무관하고 너무나 확고하게 외모만을 근거로 하는 성적인 이미지들—이 섹스에 대한 생각을 마비시키고, 섹스에 대한 기대들을 왜곡하며, 진짜 섹슈얼리티와 나르시시즘을 혼동하게 하고, 섹슈얼리티는 순전히 남들을 흥분시키는 일에 관한 것일 뿐 친밀성이나 연결성 혹은 신뢰 같은, 그 흥분의 바탕을 이루는 감정들에 대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비인간적이고 피상적인 시각을 조장한다고, 이 때문에 여자들이 성적인 것에 관해 느끼는 본능적 수준의 감정들을 변질시킬 수 있음을 매우 유려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했다. 킬본은 이렇게 썼다. “이는 진정한 친밀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진정한 욕망도 잠식한다. (…)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유사 섹슈얼리티, 자기 고유의 진짜 섹슈얼리티를 발견하는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드는 신비화된 섹슈얼리티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여자가 얼마나 섹시할 수 있겠는가? 자기 허벅지가 너무 굵다고 걱정하고 있는 여자가 어떻게 열정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미모나 패션 분야에 대해서는 꽤 느긋한 사람이고, 별로 압박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 미적인 쾌감과 멋 부리는 즐거움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기 수용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일상에서 나 자신의 몸과 맺고 있는 관계—내가 육체적 유지 및 관리를 위해 매일 반사적으로 수행하는 일들, 드럭스토어 진열대를 재빨리 훑는 내 눈의 움직임—를 깊이 생각해볼 때면, 때때로 거기서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명령을, 이건 고치고 저건 조심하라는 조용하지만 집요하고 맹목적인 요구를 의식하고는 깜짝 놀란다. 미용 제품, 여성 위생 용품, 모발 관리와 피부 관리 제품, 화장품 무더기. 가차 없이 신경을 긁으며 몰아대는 이것들이 바로 내 욕실에 존재한다. 엄청난 양의 로션, 수십 개에 달하는 병, 튜브, 포장 용기 들은 모두 단지 몸뚱이를 문밖에 내놓기 위해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노력해야 하는지 내가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은 관리를 해야 하고, 몸에서 나는 냄새들은 처리해야 하며, 보기 흉한 털들은 족집게로 뽑고 전기 제모를 하고 탈색을 해야 한다. 몸뚱이에 불룩한 곡선이 생겼으면 납작하게 들어가게 해야 하고, 툭 불거진 곳이 있으면 없애거나 특수한 의복으로 가려야 하며, 덜렁거리거나 늘어지는 것이 있으면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
이 중 대부분은 비슷하게 조용하면서도 무시하기 힘든 방식으로 강화된다. 즉 자신이 변변치 않다는 은밀하게 파고드는 의식에 의해, 여자의 몸은 수정하고 변장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미흡하고 결함 있고 어디 내놓을 만한 게 못 된다는 (엘 맥퍼슨이 눈부신 자태로 잘 짚어주는) 믿음에 의해 강화된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상태를 점검한다. 부족함들, 결함들이 하나하나 너무나 분명히 보인다. 눈은 너무 작아 윤곽을 뚜렷이 그려줄 필요가 있어. 입술은 너무 밋밋해서 립스틱을 발라 색을 입혀줘야 해. 머리카락은 생기 없고 뭉쳐 있어 (혹은 둥그렇게 부풀어 있고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아) 신경깨나 써줘야겠고, 묶거나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이쪽저쪽으로 당겨줘야겠어. 그리고 피부. 여기에 티가 있고 저기에 반점이 있고 여기나 저기나 어디나 주름살이 있다. 피부는 구제 불능이고, 피부 때문에 속이 썩는다. 피부는 자연 상태에서는 골칫거리가 너무 많은 구역이라 피부에만 쓰는 어휘가 따로 필요할 정도다. 그러니까 피부는 리바이탈라이징하고, 하이드레이팅하고, 스무딩하고, 토닝하고, 밸런싱하고, 컨투어링하고, 퍼밍하고, 플럼핑하고, 데일리디펜딩하고, 샤인컨트롤링하고, 타이니라인미니마이징하고, 안티에이징하고, 안티옥시다이징하고, 학위 취득만 빼고 다 해야 한다.

 

 

 

모델들은 노골적으로 성적 흥분을 의도한 모습으로 더 많이 제시되고, 본격적인 누드를 더 많이 쓰고 폭력의 배음을 더 많이 깔아 연출함으로써 더욱 철저히 성애화된다. 모델이 제시하는 이상들은 조목조목 한층 더 구체적이고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고스란히 노출되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신체 부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전통적으로 그 대상이었던 가슴과 다리뿐 아니라 궁둥이, 팔, 엉덩이, 복근까지), 점점 더 기괴한 형상들(체지방은 전혀 없지만 가슴은 거대한 몸, 팔다리는 근육질이지만 가냘픈 몸, 아직 스물다섯 살처럼 보이는 쉰 살의 몸)이 아름다운 것으로 제시된다.

 

 

 

육체 혐오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그 미움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게 된다. 그 힘이 얼핏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방식으로 발휘될지 몰라도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부탄가스로 열을 내는 휴대용 헤어 컬러 없이는 절대 캠핑도 여행도 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기가 생각하는 딱 그 모양으로 머리 손질을 하지 않고는 세상으로—심지어 자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남편뿐인 숲속으로도—나갈 수 없다고 느낀다. 이런 행동이 육체 혐오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욕구 문제와는 더욱 무관해 보일지도 모르지만—아마 그냥 어리석은 일로 보일 것이다—그러나 나는 그런 행동이 제약에 대한 여자의 감각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그 제약들이 욕망에 관한 여자의 경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몸에 관한 불안이 충분히 깊숙이 스며들면, ‘먹지 마’ ‘입 닫아’ ‘부탄 컬러 챙겨’ ‘반쯤 미치광이가 될 때까지 굶어’ 같은 규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완전히 자발적인 일처럼 느껴지고, 저절로 생겨나 자유로운 의사로 포용한 명령들처럼 느껴지게 된다.

 

 

 

프로비던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특히 여성 문제에 끌렸다. 차별과 낙태, 여성이 당하는 폭력에 관한 글을 썼다. 여성의 건강, 언론에 나타나는 성차별, 문화적 이미지에 관해서도 썼다. 심지어 나는 식사장애가 있는 (다른) 여자들에 관한 글도 썼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에서는 조용히 굶으며 나를 반쯤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바로 이런 것이다. 지적인 신념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뿌리는 없다는 것. 페미니즘의 힘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몸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

 

 

 

어른들이건 또래들이건 아무도 마스터베이션이나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건 불필요한 정보로 간주했다. 여자아이들은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으며, 그들에게 성적 욕구는 없거나 적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니 성적 욕구에 관해서도 별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문화가 우리 삶에 그토록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와 같은 정보 공백 속으로, 섹스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에 관한 솔직한 논의의 부재가 남겨놓은 구멍 속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새어나온 메시지들이 스며들면서 우리에게 점점 더 명료하게 보이고 들리게 되었다. 바로 그때 문화는 어조와 초점을 대대적으로 바꿀 태세를 하고 있었고, 유난히 시각적이고 강렬한 종류의 소비주의가 부상하고 있었으며, 쏜살같은 시각적 해일이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으니, 우리는 바로 그런 것들을 붙잡고 매달렸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이해해보겠다고 황급히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에 나온 이미지들을 흡수했는데, 이 이미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성적 무력함에 대한 시각적 선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성숙한 육체와 초연한 눈빛을 지닌 젊은 여자들, 가장 상품화된 방식과 가장 유체 이탈적인 방식으로, 극도로 성적인 존재로만 그려진 여자들.

 

 

 

이러한 편향은 여성의 육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더없이 편협한 성기의 관점에서 논의의 틀을 잡아, 건강한 섹슈얼리티를 성교 중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여자들은 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와 기대까지 그 패러다임에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요구받아왔다. 많은 여자들이 성적으로 ‘정상’이라는 것은 남자들만큼 목표 지향적이고 성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적어도 남자의 목표 지향과 초점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증폭시키는 것이라고 배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정신의학자이자 비뇨기과 의사 겸 섹스 연구자인 레노어 티퍼는 이렇게 썼다. 지배적인 관점에서 보는 “정상 상태는 다음과 같이 쉽고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고, 그들은 모두 남자라는 것이다.”

 

 

 

코넬대학에서 역사와 인간 발달, 여성학을 가르치는 조앤 제이컵스 브럼버그는 『바디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현재 여성 청소년의 삶에서 지극히 육체적인 측면들에 일어난 한 가지 근본적인 위기를 묘사했다. 그 위기란 생물학과 문화 모두가 여자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는 행동과 태도를 권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여자아이들은 이전 시대보다 육체적으로 더 빨리 성숙하는 듯하고,7 확실히 더욱 성적인 특성이 부각된다. 어려서부터 마돈나를 보며 자랐고 성적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대단히 노골적이고 시각적으로 성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 자신의 몸에서도 장식하고 전시하는 부분이 더 많아졌다. 서로 먼저 첫 섹스를 하려는 경주는 나의 청소년기보다 훨씬 더 열띠게 진행되어, 열여섯 살 즈음이면 거의 절반이 결승선을 통과한다.8 브럼버그의 주장대로 이 모든 일이 사회의 보호라는 귀한 자원이 거의 없어서 발달 단계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또래 압력과 과도한 대중문화에 취약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는 억압적이지만 또한 보호적이기도 했던 빅토리아시대의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들을 거론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는 빅토리아시대 때 소녀들에게 씌웠던 도덕적 우산을, [그것을 대체할] 유용한 전략이나 프로그램, 이를테면 그들이 젖지 않게 도와줄 사회적 방수복을 마련하기도 전에 내던져버렸다.”

 

 

 

“욕망은 절대 파괴되지 않는 영구성을 지니고 있다. 욕망은 소멸하지 않는다.”1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그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일에는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추구와 갈망의 조건인 허기의 경험과, 일시적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추구와 새로운 갈망에 밀려나고 마는 채워짐의 경험 사이에 감도는 긴장을 처음부터 지닌 채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일단 충족된 목표는 언제나 또 다른 목표로 이어지고, 그런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목표로 이어진다.

 

 

 

그리어는 여자들이 우는 것은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너무 많이 일하고 지쳤고 외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우는 것은 자신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고 남들의 필요를 보살피느라 자신의 필요는 계속 뒷전으로 밀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남자들이 친밀함의 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다는 느낌을 너무 자주 받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라나 거리를 두기 때문에, 자신은 그 거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당연시되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낮아지기만 하는 기대치와 남자들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적응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여자의 감정이 지닌 힘과 강함은 병적이거나 히스테리컬하거나 질척질척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관계에 대한 여자의 관심은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고, 여자의 존재의 핵심은 한 번도 제대로 봐주거나 알아주거나 온전히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여자의 진정한 자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가치 있게 여기고 인정하고 숭배하는 수많은 것들과 어긋나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자신의 사랑이 응답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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