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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보드리야르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프라하의 학생」과 동일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본다. "두 작품의 알레고리는 같다. 거울 속의 상이든 그림자이든, 그것이 파괴될 때에는 자기 자신 및 세계와의 관계의 투명성이 파괴되며, 따라서 삶 그 자체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에서 물질로의 변용 과정을 철저히 밀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는 사물처럼 분리되어 악마의 주머니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주인공에서 친숙한 것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알아보며, 악마는 그것을 주인공에게 다시 붙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그림자를 판 뒤에도 여전히 영혼을 갖고 있다. 즉 그는 변하지 않은 채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소외된 인간이란 쇠약하고 가난한, 그렇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악이 되고 적으로 변한 인간이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프라하의 학생」의 뛰어난 점은 이 진실을 그겸ㅇ하게 드러내었다는 데 있다 반면에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소외가 외관상으로만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뿐이어서, 슐레밀은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이 갈등을 추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에 선행하며 "젠더를 걸치는" 사람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중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몸은 사람의 몸이 아니다. 몸이 '사람'으로 인식되려면 문화적 기호들을 입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젠더화된) 소품과 도구로 몸을 보완하고 변형하여 전시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주경철은 서구 열강이 비유럽 세계를 손쉽게 식민화할 수 있었던 것은 총포의 힘 덕택이라기보다 전쟁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의 공통점은 더럽게 싸우고(즉 의식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고) 더 나쁜 것은 죽이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대포가 아무런 극적 요소 없이 전사나 민간인들을 그냥 죽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라마틱한 싸움에 익숙해 있던 인디언들은 그들이 보기에 전투가 아니라 학살에 가까운 유럽인들의 폭력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사형의 이 같은 비가시화와 '인간화'는 사형수가 벌거벗은 생명이 되었다는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감시와 처벌」 첫머리에서 미셸 푸코는 국왕 시해 음모자 다미앵의 처형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사형수의 고통받는 신체를 통해 스스로를 과시하는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범죄자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사물화함으로써 그의 인격을 모독하려는 권력의 광기는 본의 아니게, 그 범죄자가 여전히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다미앵의 사지를 찢으면서 권력은 그의 인격이 뿜어내는 힘-베버가 카리스마라고 부른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범죄 행위가 대담할수록 범죄자의 카리스마도 커지며, 그의 인격을 박탈하는 의례 또한 그만큼 화려해져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한편,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의 부여가 문화적 자격을 요구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지식이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습득된다고 여겨지는) 상호작용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실제로 사회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의미할 뿐이지, 그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사회적 성원권을 요구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회적 성원권은 사회성(sociability)와 별개임을 인식해야 한다. '히키코모리'에게도 사회적 성원권을 보장해야 하듯이, 외국인에게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데 '동화'나 '적응'을 조건으로 내걸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에 대한 환대의 철회는 그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나라에서 받는 대접이 못마땅하면 자기네 나라로 가면 된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한번 바꾸었다가 다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외국인'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다른 장소는 종종 허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나는 두 가지 예를 들고 싶다. 하나는 재일조선인들의 '조선'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원주민들의 '홈랜드'인 반투스탄이다.

     

     

     

    선진국에 수출할 커피나 설탕을 생산하느라 식량을 재배할 땅이 모자라고, 선진국의 손님들이 이용할 별장, 호텔, 스파, 골프장, 카지노를 짓느라 집과 학교를 지을 공간이 부족한 그 나라는, 반투스탄이 남아공의 일부인 것처럼, 사실상 선진국의 일부이다. 

     

     

     

    다시 말하면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는 여성에게 을, 남성에게 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삼종지도'와 호주제(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2005년에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안/밖의 구별이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남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물리적 의미에서의 사회는 남성에게 속해 있었다. 직업의 세계와 '활동적인 삶'에서 배제됨으로써, 여성은 국회, 법원, 시청, 은행 등이 있는 공적인 공간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여자들은 아버지와 남편과 남자 형제들이 매일 아침 무리지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커튼 뒤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한편, 여성은 친목과 사교의 공간으로부터도 배제되었다. 다방이나 술집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음식점을 이용할 때조차 여자들은 어떤 금기의 벽을 느껴야 했다. 예를 들어 막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갔을 경우,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서비스를 거부당할 수 있었다(유사한 금기가 택시 운전사들 사이에도 존재하였다). 여성이 이런 장소에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남성의 초대를 받았을 때에 한해서이다(약혼자와의 데이트나 결혼기념일의 외식 등).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 신발이나 밥그릇과 같은 방식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 즉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 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명예의 세계에서 개인은 자신의 방패에 새겨진 사회적 상징이다. 기사의 진정한 자기는 그의 역할을 표시하는 휘장을 몸에 지닌 채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갈 때 분명해진다. (...) 반면, 근대적 의미의 존엄의 세계에서 인간 간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사회적 상징은 가장일 뿐이다. 방패꼴 무늬는 진정한 자기를 감추고 있다. 더 진실하게 그 사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벌거벗은 인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성性의 표지를 드러내놓고 있는 벌거벗은 남자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그의 선조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자기를 발견"한다. "명예의 세계에서 개인은 진정한 정체성을 역할 속에서 발견한다. 그 역할에서 도망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과 같다. 존엄의 세계에서 그는 사회가 부과한 여러 가지 역할로부터 자기를 해방함으로써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역할들은 단순한 가면이며, 그를 환상과 소외와 자기기만에 빠뜨린다."

     

     

     

    현대적 자아-매킨타이어가 정의주의적이라고 명명한 자아-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이러한 의문과 관련이 있다. 아마 우리는 공적인 자아를 벗어던진 뒤에도 여전히 어떤 자아를-사적이고 내밀하며 우리 자신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까운 자아, 더 편한하게 걸칠 수 있는 자아를-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번째 자아는 모든 공적인 문제로부터 물러나 있기 때문에, 결코 그 자체로서 완전할 수 없다. 아렌트가 주장하듯이 활동적인 삶이 행동action에 의해 완성되고, 타자의 존재가 바로 행동의 조건이라면,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철수한 이 자아는 행동의 가능성을 알지 못하는 만큼, 어떤 동물성 속으로 굴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낙인을 가진 사람이 언제나 배척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이유로, 혹은 신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유로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받는 장애인처럼, 낙인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고 사랑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인격에서 돌출된 부분, 즉 낙인이다.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의 관념은 낙인을 초래하는 불명예스러운 속성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추는 차이들이 모두 사소하고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낙인자the stigmatized와 정상인the normals의 만남은 어떤 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 미디어에 종종 나오는, 낙인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 통합 의례-고아들에게 키스하는 연예인, 장애인을 목욕시키는 정치인 등등-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욕을 의례적 코드의 위반으로 정의할 때 생겨나는 역설은 의례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 즉 행위자들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의례적 권리/의무가 달라지는 사회에서는 의례적 지위가 낮은 사람(실제로 모욕적인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큰 사람)일수록 이론적으로는 더 적은 모욕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왕이나 영주처럼 고귀한 신분에게는 작은 결례도 큰 모욕이 될 수 있다. 모욕은 그것이 손상시키는 것, 즉 명예의 중대함에 비례하여 중대해지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에게 저질러질 수 있는 무례함의 한도가 커진다. 노예처럼 아무런 명예를 갖지 않은 자에게는 어떤 행동을 해도 모욕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사실이지만, 나이를 따져서 높임말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통의 잔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습관이다. 조선 시대의 양반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민에게 말을 놓았다. 신분이 나이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장유유서는 신분이 같을 때 적용되는 원칙이다.

     

     

     

    모욕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을 강조하면서 단호하게 항의할수록 효과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반면에 굴욕을 당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사건 자체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굴욕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쿨하다'와 '찌질하다'이다. 신인 시절의 '굴욕 사진'을 들킨 연예인은 심야 토크쇼에서 성형 사실을 '쿨하게' 인정한다. 그러면 추락하던 인기가 다시 올라간다. 여기에 비해, 악플을 단 네티즌을 고소하는 것은 '찌질한' 방법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 쿨하지 않으면 찌질해지는 세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굴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루저'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 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상대방에 대한 앎(또는 알아나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우정은 기독교적 사랑과 구별된다. 기독교적 사랑은 무차별적이며, 개인들의 차이를 괄호 안에 넣는다. 그래서 아렌트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이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아렌트의 신랄한 지적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타자에게 모든 것을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자에게 무관심하며 어떤 의미에서 타자를 이용한다. 타자에 대한 그 같은 헌신 밑에 있는 것은 증여를 통해 자아의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순수한 관계를 지향할수록 우정은 쉽게 좌초한다. 우정은 연애처럼 안전한 정박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우정은 맹세의 말이나 서약의 징표, 의례와 기념일, 증인과 보증인, 시작과 끝을 공식화하는 서류들을 알지 못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만의 관계로 머문다(반면 결혼은 하나의 계약으로, 모든 계약이 그렇듯이 그 효력을 보증하는 제삼자를 포함한다). 우정을 지탱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억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정을 순수한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는 우정이 그만큼 많은 결별의 계기들을 품고 있다는 말도 된다.

     

     

     

    물질적인 면에서 전업주부의 삶은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돈을 잘 버는가 못 버는가? 관대한가 인색한가? 가정적인가 아닌가? 하지만 남편이 어떤 사람이든 그에게 생계를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전업주부는 우정이라는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 남편과 그녀 사이에는 우정이 생기기 어렵다. 남편은 그녀가 주는 모든 것을 자기가 준 것의 일부를 돌려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녀가 남편의 생일에 선물한 넥타이는 남편의 돈으로 산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선물을 할 수도 없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남편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남편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선물하는 것은 처음 선물한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아내가 아무리 비싼 옷을 사도 나무라지 않는 관대한 남편이라도, 아내가 자기 몰래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것을 알면 화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업주부는 증여자giver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정은 일종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정을 나누려면 먼저 증여자가 되어야 한다.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이다. 환대의 조건 또는 한계에 대한 논의들이 암시하는 바와 달리, 절대적 환대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벽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혁명의 시간이나 축제의 시간에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공동체의 임재를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절대 공동체를 시적 형태가 아니라 산문적 형태로 현실 속에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번번이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문도 없고, 문지방도 없으며, '자기만의 방' 따위는 더더구나 없는 그런 공동체에서 우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비밀을 간직할 수도 고백을 할 수도 없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일도 함께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 국가는 '효에 죽은' 자식과 '충에 죽은' 신하를 기리기 위해 비와 문을 세운다. 이 비와 문은 사회 안에 있는 그들의 자리를 표시한다. 그들은 비록 몸을 잃었지만, 그 덕택에 누구보다 확고한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를 지탱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도덕이었다. 수많은 꽃다운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데 새로운 언어나 논리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낡은 도덕의 어떤 요소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황은皇恩'의 무거움과 목숨의 가벼움, 그리고 희생자들이 사후에 얻게 될 자리의 영원함을......
    환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살 비행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이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국가와 적대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국가는 끝까지 이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말이다. 전쟁을 하는 모든 국가에서 군인은 자기가 속한 국가와 적대 관계에 놓인다. 하지만 이 사실은 명예와 희생, 그리고 채무의 수사학에 의해 철저히 숨겨진다. 일본에서 전몰자에 대한 위령이 그토록 까다로운 정치적 쟁점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데, 전쟁의 희생자들을 공적으로 애도하는 일이 금지됨으로써, 그들이 어떤 명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물건처럼 소모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다른 모든 '정상 국가'가 행하는 기만이 일본에게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싱어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해결책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며, 누구에게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안락사와 같이 한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문제를 비용의 관점에서 논의한다는 것이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몇 달러에 불과한 항생제나 백신이 없어서 죽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 반대의 시각도 가능하다. 수백 명을 살릴 수 있는 돈을 단 한 사람의 삶-그것도 당사자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삶-을 연장하는 데 다 써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낙태의 합법화는 이 원리를-위반하기는커녕-다시 한 번 확인한다.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때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의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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