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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 이상의 것을 원하는 그 욕망 자체에 의의가 있으며, 효용이 아닌 낭비가 삶을 풍부하게 한다고 여긴 보들레르에게 삶은 ‘써 버리는 것’이었을 거다. 보들레르의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번역한 故 황현산 선생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치에 대한 욕구는 보들레르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관한 증거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이 삶이다. 하다못해 연필이라도 좋은 것을 사서 써야 한다.”

      보들레르처럼 힘들게 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삶에는 생존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그에 비하면 엄청난 탕진은 아니다. 오만 원이 있으면 오만 원을 쓰고, 십만 원이 있으면 십만 원을 쓰는 식의 소소한 탕진이다.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사용하신 표현을 빌리자면 “돈이 손에 있는 꼴을 못 보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현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자 한다.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그럭저럭 행복하다. 월급을 탈탈 털어 맛있는 것을 사 먹으며 “돈이 최고야!”를 외치면서도 결코 돈을 모으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2019년에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에 실린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기사가 SNS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왜 젊은 한국인들은 돈을 펑펑 쓰는 것을 좋아하는가(Why Young Koreans Love to Splurge)’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시발 비용(Shibal biyong)은 승진에서 누락된 날에 지하철을 타는 대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거나, 상사에게 질책을 받은 후 비싼 초밥을 사 오는 데 드는 비용이다. 불필요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쁜 날을 이겨 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용어는 장기적인 전망이 어둡기 때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암시한다. 좋은 코트를 사라.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 집을 살 수 없을 테니까. 지금 당장 스테이크를 먹자. 우리는 절대 은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알라딘 eBook <우아한 가난의 시대> (김지선 지음) 중에서
     
     
     
      이후로는 1980년대 초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지출 증가율이 베이비부머 세대보다 두 배가량 높다는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부모 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들의 소비 패턴은 재정적으로 암울한 미래와 오늘의 작은 행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이어진다. 최고의 스펙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연봉을 받게 된 세대가 눈앞의 케이크를 탐닉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돈의 효용을 극대화시키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현실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인 것이다. 기사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지출하게 된 비용을 뜻하는 ‘시발 비용’, 낭비하는 재미를 일컫는 ‘탕진잼’ 등의 신조어가 ‘fuck-it expense’며 ‘squandering fun’이라고 번역되어 전 세계의 SNS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 흥미로웠다. 미국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않다거나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식의 말들이 덧붙여졌다.
      이것은 한국이라는 특수 지형에서 살아가는 좁은 세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몇 년 전 호주의 부동산 재벌 팀 거너는 한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 해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으깬 아보카도를 올린 빵을 사는 데만 20달러씩 쓰죠. 무슨 수로 집을 사겠어요? 안타깝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생 내 집 마련을 못 할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때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베지 마이트를 바른 빵을 생수와 함께 대충 씹어 넘겼다는, 매우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덧붙였다. 젊은이들은 “그의 말이 맞다. 일주일에 20달러씩 아끼면 175년 뒤에는 집의 보증금을 모을 수 있다”라거나 “오늘 아침엔 으깬 아보카도를 먹지 않았다. 곧 집을 살 생각에 신난다”며 냉소했다. 런던에 사는 나의 친구는 ‘샴페인 라이프 스타일 온 레모네이드 머니(Champagne life style on Lemonade money)’라는 말을 알려 주었다. 돈이 없어도 축배를 들어야 하는 젊은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가 아는 한 영국인 친구도 낭비의 효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알라딘 eBook <우아한 가난의 시대> (김지선 지음) 중에서

     

     

     

      보들레르의 시대에 젊은이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권태였던 것 같다. 많은 예술가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무엇도 하고 싶지 않게 하는 권태라는 놈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면에 21세기의 젊은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수치심이 아닐까 싶다. 인정할 수 없는 상사와 함께 일하는 고통. 그의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은 훨씬 더 적은 연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서늘함. 그리고 미래를 잊기 위해 현재를 마취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공포. 이 와중에 즐길 것들은 천지에 널려 있는 상황은 확실히 권태로움보다 수치심을 안겨 준다. 그러니까 오늘의 사치는 오늘의 수치심을 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바람을 하나 덧붙인다면,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충분한 우리의 사치에 ‘탕진잼’이나 ‘시발 비용’보다는 좀 더 우아한 언어가 따라 붙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인터뷰로 만났던 문정희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모두가 메신저 언어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까 축약된 말과 과격한 말들이 넘쳐나죠. 하지만 시의 언어를 읽고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인간은 언어로써 존재하는 거잖아요. 물 한 잔도 고급 브랜드의 생수를 찾아 마시는 사람들이, 흙탕물 언어를 쓴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에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상황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그녀는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발가락에 반지를 껴 보거나 향수에 리본을 매달아 화장실에 걸어 놓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장치들이 필요하다.

    -알라딘 eBook <우아한 가난의 시대> (김지선 지음) 중에서

     

     

     

      마음껏 낭비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품목이 몇 가지 있다. 부자들에게는 미술품이 그렇고,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책이 그렇다. 물질적인 무엇이 아닌 정신적인 무엇을 구입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림이나 가구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한두 권씩 사 모으다 보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책 정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짐 보관 서비스 ‘마타주’의 광고가 몇 달 째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있는 이유다. (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나의 고민을 알아 차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상에서 나를 따라 다니는 모든 광고가 그렇듯이 말이다. )

    -알라딘 eBook <우아한 가난의 시대> (김지선 지음) 중에서

     

     

     

      클레어는 밥 켄드리가 수위로 일하는 건물 꼭대기 층에 사는 재단사의 잡다한 심부름을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받는 자신의 주급에서 일부를 취하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걸 클레어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단념하지 못했다. 주일학교의 피크닉에 가고 싶었고, 새 옷을 입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게 뻔하고 위험할 수 있다 해도, 그녀는 그 보잘것없는 빨간 원피스를 만들 옷감을 사기 위해 돈을 따로 남겨두어야 했다.

      그 시절에도 이미 클레어 켄드리의 삶에 대한 개념 안에는 희생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자기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기적이고, 차갑고, 끈질겼다. 그럼에도 가끔은 연극이 아닌가 싶을 만큼, 상대의 마음에 따스함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고양이 같은. 그녀를 한마디로 묘사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클레어 켄드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모질고,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따금 그녀는 살갑고, 막무가내로 충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자극을 받으면 비로소 나타나 사람을 놀래는 숨겨진 적의가 있었다. 일단 그렇게 되면, 그녀는 아주 제대로 할퀼 줄 알았다. 화가 나면, 어떤 위험이든 잊거나 무시하고 사납고 격렬하게 싸웠다. 힘의 우위나 상대의 수, 불리한 여건 따윈 상관없었다. 남자애들이 클레어 아버지의 한쪽으로 기운 별난 걸음걸이를 빗댄 노래를 지어 조롱하며 부르고 다녔던 그날, 그녀가 그들에게 얼마나 사납게 발톱을 세웠던가! 그리고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그리고 차츰 아이린의 마음에 불쾌하면서도 지겹도록 익숙한 불안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으나 눈은 번득였다.

      저 여자가 여기 드레이튼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바로 자신의 눈앞에 흑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알 수 있었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백인들은 그런 면에서는 너무도 허술했다. 그들이 구별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대개 이런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손톱, 손바닥, 귀의 생김새나 치아, 그리고 다른 기준 역시 어리석은 헛소리들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이탈리아 사람이나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 아니면 집시로 여겼다. 그녀가 혼자 있을 때면 그들은 결코 그녀가 흑인이라는 어렴풋한 의심마저도 품지 않는 듯했다. 그래, 저기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라고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이 차례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이 드레이튼 측에서 취하리라 예상되는, 제아무리 정중하고 세련된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랬다.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클레어는 빈정대듯 얼굴을 찡끗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분들 생각에는 고된 일이 나한테 좋은 거였어. 내 몸에는 흑인의 피가 흘렀고, 그분들은 ‘흑인들은 노동을 원하는가?’ 같은 제목의 긴 기사를 쓰고 읽던 세대였으니까. 그들은 또, 노아가 술이 좀 과했을 때 함이 그를 조롱했기 때문에, 자비로운 신이 함의 아들딸들을 땀흘려 일하도록 만들었다는 얘기를 이만저만 믿는 게 아니었어. 대고모들이 그 늙은 술고래가 함과 그의 자손들을 영원히 저주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

      아이린은 웃었다. 그러나 클레어는 여전히 꽤 진지했다.

      “정말이지, 그건 그냥 농담이 아니었어, 린. 열여섯 소녀에게는 고된 삶이었지. 머리 위에 지붕이 있고, 음식과 옷이 있긴 했어도 초라하기만 했어. 그리고 성경이 있었지. 도덕과 검소함과 부지런함, 자비로운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관한 말씀이.”

      “클레어, 너 그런 생각 해본 적 있니?” 아이린이 물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불행과 지독한 학대가 용인되는지? 그것도 늘 가장 열렬한 신자들에 의해서 말이야.”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누가 봤다면 참 편안한 티파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두가 미소 짓고 농담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아이린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흑인을 싫어하신단 말이네요. 벨루 씨?” 그러나 그녀의 말은 생각만큼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존 벨루는 아니라는 투로 짧게 웃었다. “레드필드 부인, 그 점에서는 저를 잘못 보신 겁니다. 전혀 아니죠. 난 그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난 그들을 증오합니다. 닉도 마찬가지죠. 깜둥이가 되려고 저렇게 애를 쓰면서도 말이죠. 저 사람은 깜둥이 하녀조차 옆에 두려 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내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난 그것들 아주 소름이 끼쳐요. 저주받을 검은 악마들 같으니라고.”

      농담이 아니었다. 벨루에게 알고 지냈던 흑인이 있었는지 아이린이 물었다. 그녀의 방어조의 목소리는 안절부절못하던 거트루드를 다시 놀라게 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으나, 순간 클레어도 염려하는 눈치였다.

      벨루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없습니다! 절대로 없죠! 대신 시꺼먼 그놈들 자신보다 그것들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을 알지요. 그리고 신문에서도 그들에 대해 읽습니다. 노상 약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그가 험악하게 덧붙였다. “그보다 더 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 놈들.”

      거트루드 쪽에서 억눌린 이상한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콧방귀인지 킥킥대는 소리인지, 아이린은 구별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타오르는 분노와 화를 참아내기에는 자신의 자제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문득 옆에 앉은 남자를 향해 외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 검은 악마 셋에 둘러싸여 차를 마시고 있어.”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그녀가 말했다. “‘패싱’이란 게 좀 묘하긴 해. 우린 그걸 비난하면서도 용납하잖아.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기도 하고. 극도로 혐오하고 멀리하면서도, 눈감아주고.”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그녀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그가 주어진 것들과 더불어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단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자기가 그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에 따라서만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점은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또 아들들을 위해,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위해 자신이 고집하는 삶의 터전과 자산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계획도, 그 어떤 방식도 인정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그런데 그 사람이 네가 준비하는 그 댄스파티에 온다는 거야?”

      아이린은 왜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런 사람이 흑인들의 댄스파티에 오다니 이상하잖아.”

      지금은 1927년이고 여기는 뉴욕이라고, 휴 웬트워스 같은 백인들이 점점 더 많이 할렘의 행사에 오고 있다고 아이린이 말했다. 너무 많이들 와서 브라이언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조만간에 유색인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생겼군. 아니면 들어가도 짐 크로 법에 따라 격리 좌석에 앉든가.”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벽난로 불빛이 아늑한, 조용한 거실에 홀로 앉아 아이린 레드필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랐다. 인종의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처음으로 부담스럽고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조용히 부르짖었다. 인종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느냐고.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부당했다. 분명, 피부가 검은 함의 자손들만큼 저주받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 일을 해내기에는 연약하고 소심했음에도 그녀의 타오르듯 간절한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 아이린이 원하는 것은 존 벨루가 아내의 핏속에 검둥이 피가 섞여 있음을 발견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가 이 도시에 없는 동안 자기 아내가 줄곧 흑인들의 할렘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기를 바랐다. 그뿐이었다. 클레어 켄드리를 영원히 제거하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당신 생각은 완전히 틀렸어! 당신 결정대로 저애들이 이 빌어먹을 나라에 살아야 한다면, 어떤 일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알아낼수록 좋은 거야. 더 일찍 알수록,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거라고.”

      “내 생각은 달라. 나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내고 가급적 그런 일들은 몰랐으면 해.”

      “아주 훌륭하시군.” 브라이언의 빈정대는 대답이었다. “진짜 아주 훌륭해. 완벽한 대비야. 하지만 그게 되려나?”

      “분명히. 당신이 맡은 부분만 잘해준다면.”

      “헛소리! 아이린 당신도 나만큼 잘 알고 있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걸. ‘깜둥이’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아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우리가 그렇게 애써봤지만 무슨 소용이 있었어?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냈잖아? 그것도 어떻게? 누군가 주니어를 더러운 깜둥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지.”

    -알라딘 eBook <패싱>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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