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장 아메리

 

재밌게 읽었는데...

유나바머 매니페스토처럼 인상깊게 읽었다고 남들에게 추천하긴 되게 뭐한 책이었다.

 


 

자살? 나는 이 단어가 싫다. 적당한 때 그 이유도 밝히겠다. 차라리 나는자유죽음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물론 자살이라는 행위가 참을 수 없이 강제된 상황 탓에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은 익히 안다. 그러나 죽음의 한 방법으로서 자유죽음은 나사를 끼우듯 고정하려는 강제 안에서도 자유롭다. 그 어떤 종양이 나를 갉아먹지 않으며, 심근경색이 나를 덮치는 것도 아니다. 요독증(尿毒症) 때문에 숨이 멎지도 않는다. 자발적으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바로 나다. 수면제를 ‘손으로 입에 가져간’ 다음 나는 죽어가며 손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도 ‘자살학’이 말하는 법칙들이 무력해지지는 않는다. 구스틀 소위의 경우 ‘자살학’은 저 명예 수칙이라는 게 행사하는 강제력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라고 지적하고 나서리라. 가정부의 경우에는 불행한 사랑이 자살을 야기한 요인이라고 할 게 틀림없다. 그 불행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좀 더 깊숙하게 숨어 있던 인생의 불만이 결국 자살이라는 행위로 이어졌다고 말하겠지. 첼란과 손디를 두고는 아마도 심인성 우울증이 그 원인이었다고 하리라. ‘자살학’의 진단에 틀린 것은 없다. 다만,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일 따름이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situationvecue)’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고 시도할 때마다 누구도 들춰 볼 수 없는 장막이 가려진다.

 

 

 

 

부부싸움으로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먹고 순전히 우연 탓에 ‘목숨을 건진’ 한 남자를 나는 안다. 그는 스물네 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지만, 오늘날 멀쩡히 살아 있다. 평소에 잘 알던 신경과 의사에게 끌려간 남자는 일장 훈계를 들어야만 했다. 의사는 근엄한 얼굴로 부부싸움이나 눈물 혹은 화해 같은 일은 어디까지나 보드빌(Vaudeville)10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려 들더란다. 내가 보기에 의사는 작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 뭐가 보드빌이며, 무엇이 진짜 비극인지는 작품의 저자, 즉 당사자만이 안다. 대개 아주 잠깐이지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끌기도 하는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신분이라는 차이까지 깨끗이 지워버린다. 저 가정부 처녀는 위대한 작가나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만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살을 바라보는 데 있어 역사성의 관점은 피해야 한다. 살아가며 겪는 모든 시절은, 그러니까 실제에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저마다 나름의 논리를 가진다. 그에 알맞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시간을 통해 성숙한다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보자. 우리의 불쌍한 가정부 처녀는 창문에서 뛰어내릴 당시와 똑같은 진정성을 나중에 결코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그놈의 사랑 때문에 무슨 덕이라도 보았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사랑을 충실히 채웠을 따름이다. 비록 대답 없는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존재에 강력한 밀도를 불어넣었다. 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나중에 착한 남자를 만나서 아이들을 낳고, 그들에게 둘러싸였어도 결코 누릴 수 없는 밀도가 아닐까. 극단적인 선택이기는 했지만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녀는 뛰어내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진솔한 인생을 살았다.

 

 

 

 

미리 정해져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법칙’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우리 일상생활의 행동이 이 법칙으로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속에도 녹아들어 있다. “뭐 다 살려고 하는 일이죠.”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일들을 두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묻자.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다. 아예 이 자연법칙을 돌돌 뭉쳐 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발 앞에 던져버린다. 마치 연극 무대 위의 관료가 상관에게 계약서를 집어던지듯. 이제 자연의 규정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한 뭉치의 휴지 조각일 따름이다. 자유죽음을 찾는 이는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아니야! 혹은 둔중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다.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 나는 아니야! 나는 원치 않아. 밖에서는 사회의 법으로, 안에서는 ‘자연법(lexnaturae)’으로 느끼도록 충동하는 강제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사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나는 더는 인정하지 않겠어.

 

 

 

다시 생명을 회복한 자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다. 우리 문화에서 자살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몹쓸 병에라도 걸렸던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심지어 가난보다도 더 창피한 것처럼 얼굴을 붉힌다. 그는 말한다. “그저 평안을 얻고 싶었소. 그냥 편안하게 쉬고 싶었소.” 마치 죽음이 삶의 한순간인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없음이 아니라, 존재 범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그래서 동시대의 자살 연구가들은 자유죽음에서 강제로 떼어진 사람이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고 나서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라거나 심지어 ‘초콜릿까지 먹었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무슨 문학 표현처럼 ‘그저 편안하게 행동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두고 즐거워한다. 안도의 한숨이라도 쉬는 것처럼. 하지만, 정말 편안했을까? 나는 그렇게 믿기를 거부한다. 완전한 부정이라는 짙은 안개가 걷혀버리고, 좁아지기만 하던 벽들이 다시 넓어지는 것을 정말 그가 보았으리라고 믿지 않는다(나 역시 지나친 비유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내 유일한 전달 수단인 언어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을 어쩌랴. 말로 담아내기 힘든 것을 시도하고 있는 내 고통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비유야 어쨌든 간에 내 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저 ‘평안’과 ‘깊은 잠’을 구하며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그의 존재가 갖는 한 영역, 곧 에둘러 우리가 ‘잠재의식’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자신이 잠과 평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어떤 것에로 뛰어들고 있다는, 그러니까 어떤 것일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뛰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것일 수 없는 어떤 것? 무엇인가에 뛰어들고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는 것, 아니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것! 참 난처한 표현이기는 하나, 이런 것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너무나도 끔찍한 것, 이게 바로 없음으로서의 죽음이다.

 

 

 

 

자연적인 죽음은 이제 논리 언어로 정의된다. 이에 따르면 자연적인 죽음은 자연을 통해 일어나는 죽음, 즉 시간·공간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누구나 알고 있는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 죽음이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고 나면 죽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로 자리를 잡는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뿐이라고 일상 언어는 말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망자는 자신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하고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것을 들어야만 가까스로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이때 죽은 육신, 곧 시체가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완전한 해체로 이끄는 화학 과정이 시작된 시체가 무슨 평안을 느끼겠는가. 그리고 임종의 방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말들을 입에 올린 사람일지라도 계단으로 나가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안다. 그저 그동안의 관습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그는 주워섬긴 말의 틀을 깨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리리라. 저기 저 망자는 평안하지도 그렇다고 괴롭지도 않아. 참으로 죽음이란 어찌 생각해야 좋을지 까다로운 게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생각은 이어진다. 내 경우는 어떻게 될까? 나도 여기저기 눌리면서 평안하지 못할까? 오 이런, 맙소사! 자신이 신앙인임을 자인하며 종교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지 않는다. 죽어 분해되어 가는 자신의 육신을 떠올리면서도 신을 진지하게 찾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자연적인 동시에 부자연스러운 죽음은 신보다도 위대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 마주치지만, 신은 언제나 숨어 있다. 이게 바로 신이 현현하는 방식인 것을 어쩌랴.

 

 

 

인간은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상량식을 올리는 축제의 날에 허물어져 내릴 집을 짓는! 물론 인간은 ‘자연적인 죽음’을 희망한다. 그 같은 희망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자기 자신의 일부를 짓는다. 그 일부는 자율적45으로 멍하니 객관적인 사실,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본다. 객관적인 사실? 여기서만큼은 일상의 언어가 정밀한 논리의 언어와 맞아떨어진다. 이때 인간의 지성과 도덕 양심은 비참함을 맛본다. 나만의 집을 짓겠노라고 호기롭게 큰소리치며 나를 떠나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본래의 나다. 이 자아는 일단 죽음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장차 아무런 평안을 누리지 못하리라. 인간은 구슬땀을 흘리며 집을 짓는다. 벽돌에 벽돌을 쌓으며, 창틀을 세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헛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셰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원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은 ‘에셰크’ 속에서도 살 수 있다. 물론 아주 치욕적인, 말하자면 ‘비자연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에셰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치 무슨 수치스러운 짓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듯 자살이라고 부르는 자유죽음을 그는 감행했다. 그래도 ‘에셰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제 ‘에셰크’는 당사자의 등 뒤에서 상존하는 위협이다. 그리고 ‘에셰크’는 죽음보다도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도 참아내야만 한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견습공더러 최고 경영자와 똑같이 행동하라고? 공산당 당원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라고? 늘 남들을 두고 허약하다고 한다. 항상 남들이 더 강해 보인다고 투덜댄다. 아마도 ‘에셰크’의 위협을 가장 분명하게 느끼는 쪽은 내가 ‘수험생 상황’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리라. 구두시험을 눈앞에 두었다. 수험생 쪽에서는 피할 길이 없으며, 시험관은 자비라고는 모른다.

 

 

 

할 수 있다면, 하면 그만이다. 할 수 없는 사람은 떨어진다. 끝 모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시험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다. 수험생은 입을 쩍 벌린 심연 위에서 간신히 밧줄에 매달린 채 떨고 있을 따름이다. 밧줄이 언제 끊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떨어진 수험생은 자신 앞에 다가오는 게 무엇인지 팔짱 끼고 구경해야만 한다. 부모도 친구도 다 소용없다. 물론 이들은 이해한다고 말한다. 다 알고 있노라고 다독이려 한다. 안다고? 무엇을? 지독한 쓰라림 속에서 ‘에셰크’를 삭혀야 하는 사람은 당사자일 뿐이다. 그래서 곡물 상인은 에밀 슈트라우스(EmilStrauß)의 앞으로도 길이 남을 걸작 《친구 하인(FreundHein)》에서 하인리히 린트너(HeinrichLinder)가 그랬던 것처럼 권총을 잡았다. 돌연 곡물 상인의 자유죽음은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분명한 자연스러움을 얻는다. 이런 자연성은 할머니의 죽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다. 끊임없이 ‘에셰크’의 위협을 받으며 사는 사람은 많기만 하다. 수험생, 파산자, 평론가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작가, 창작력의 고갈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화가, 병자, 눈물로 아무리 호소해도 대답이 없는 사랑, 돌격 명령을 앞두고 덜덜 떨고 있는데 장교에게서 질책을 받는 군인 등등. 이들에게 자유죽음은 구원의 약속이 된다. 실패와 좌절의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끝까지 생각해보라며 권해지는 자연 죽음은 최악의 ‘에셰크’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모든 것이 헛되다. 가슴속에 품고 있던 세상이 어느 날 돌연 와르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저녁의 어스름한 공원, 처음으로 혀가 얽히며 나누었던 키스의 달콤한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준비해온 초연 무대의 막이 드디어 내리고,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기대했건만 홀로 쓸쓸히 텅 빈 극장 무대에 서 있을 따름이다. 다이아몬드를 더욱 빛나게 다듬어야 할 도구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구두 밑창을 기워야 할 바늘이 왜 하필 지금 부러지고 마는 것일까?

 

 

 

그러니까 인간은 바로 인간성과 존엄성을 방패 삼아 ‘에셰크’에 맞선다(여기서 아직 자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물론 자유도 앞으로 다루겠다). 인간은 ‘에셰크’를 참아낼 수 없다. ‘에셰크’로 추락하고 나서 반쯤 으깨진 몰골로 사람은 바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떨쳐 일어나 죽음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긴다. 지금 우리가 심리학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에셰크’의 심리학을 가지고 토론할 생각도 없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어떤 조건 아래서 ‘에셰크’로 규정되는가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심판관은 곧 그 개인 주관과 사회다. 양쪽의 판단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특히 자살의 경우에는 더욱 그 엇갈림의 정도가 심하다.

 

 

 

우선, 사회는 종족 보존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살을 거부한다. 여기에 다시 문명은 종교와 도덕을 덧붙인다. 이때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는 문명에 봉사하는 충직한 하인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먼저 죗값부터 치르고 사회로부터 면허증을 교부받은 전문의에게 될 수 있는 한 빨리 상담을 받은 다음, 어디 회사라도 취직해 월급쟁이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알아, 열심히 일하다 보면 막판에 다시 성공을 거머쥘 수도 있잖아. 어쨌거나 그의 정신 나간 이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문명사회는 목청을 높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것처럼, 그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먹을 을러댄다. 이와는 반대로 주관은 자신의 권리를 고집한다. 주관은 ‘에셰크’를 당했음에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처럼 때만 되면 먹고 싸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주관은 사회를 무시한다. 자신의 자유죽음으로 불행해질 가족도 무시하기 일쑤다. 죽은 자와 함께 살 수 없어 난처한 가족은 냉가슴을 앓는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관은 자신의 존엄성만 더욱 강화할 따름이다. 홍수야 일어나든 말든 이미 세상을 떠난 자신에게 무슨 상관이랴 하는 태도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점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자유죽음으로 이끄는 ‘에셰크’ 의식에는, 이 ‘에셰크’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수험생의 불합격)이든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에셰크’(결국 인생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든, 먼저 구토의 감정이 선행돼야만 한다. 평범하게 살라는 말은 ‘에셰크’를 끌어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사회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요란을 떨지 않아 고맙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 자살하는 사람은 요란을 떠는 옹졸한 인간이다. 그러나 구역질을 늘 달고 사는 사람에게 인생 안의 ‘에셰크’와 인생 자체의 ‘에셰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다. 아픔에 가슴이 쓰라리지만 이를 악물고 자부심을 내세우며 거부하기로 굳은 결심을 한다. 더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소수파에 가담하기로 한다. 이 소수파의 사람들은 말한다. 살아서 흘리는 눈물은 비겁함일 뿐이라고, 소심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치 모든 공포의 근원인 저 죽음의 공포에 이마부터 들이대는 것 이상으로 드높은 용기는 없다는 듯이.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쩍 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사람에게 묻는다. 왜 참아낼 수 없느냐고,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사회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자살이란 역사를 조감한다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었을 따름이다. 중국에서는 공자의 사망 이후 자살을 사회적 해악으로 보았다.고대 그리스에서는 헤게시아스(Hegesias)라는 철학자가 출현해 한때 잠깐 자유죽음을 열렬히 옹호했을 뿐이다. 후기 로마에서 자유죽음은 원래 품격과 예의의 문제였으며, 서고트족에서는 노인들이 스스로 바위 위에 올라 몸을 던지곤 했다. 신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역사를 일별하면 사회가 자유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인생 논리는 승리에 승리를 구가해왔다. 논리적으로 맞는 방향이었다. 인생 논리는 본능일 뿐 아니라, 내가 앞 장에서 보여줬듯, 논리라는 원칙에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 곧 존재와 인생의 이성은 도무지 없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비교라는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것과 견줄 때 가능한 것일따름이다.

 

 

 

그럼에도 자살 시도에 성공한 사람은 매몰차게 잊어버리고, 자살 시도에 실패한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하는 게 인간적인 태도일까? 인간다운 정서로 보자면 그들을 먼저 따뜻하게 품어 안아야 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 매우 발달했다고 자처하는 유럽 중부의 어느 작은 나라에서는 ‘구출된’ 모든 자살 시도자를, 그가 자신의 행위를 감추려 하지 않는 한, 직권으로 정신병원에 넣어버린다. 나는 한 젊은 여인의 사례에서 받았던 충격과 부끄러움을 절대 잊지 못한다. 여자는 단지 자신의 자유죽음 의도를 발설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친 털실로 짠 참회의 죄수복을 입고 정신병자들 사이에 섞여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몇몇 멍청이의 심판을 기다려야만 했다. 지적인 능력으로 따지자면 여인이 그 심판관들보다 커다란 탑 높이만큼 더 뛰어났다. 일면식 없는 위원들로 이뤄진 위원회가 그녀를 풀어줘도 좋은지, 풀어준다면 언제가 적당한지, 결정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을 두고 그저 빙 돌려 이야기할 뿐인 이런 믿지 못할 월권이라니!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할 전근대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과학의 오만을 깨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과학이 죽음을 두고 무얼 알 수 있는가.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해둔다.

 

 

 

아, 저기 우울증 기질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 그의 마스크는 굳어져 있으며, 아무 표정이 없거나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환자’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잘난 척에 끙끙 앓으며 세상에 등을 돌린다. 과학은 아주 가끔 행태의 확인이라는 도식을 벗어나 조금 더 나아갈 따름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리 주어져 있는 가설을 간신히 떨쳐버린다. 이럴 때 등장하는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는 치욕적이며, 현재는 고통스럽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콜로나(L.Colonna)가 《자살과 정신 질환 분류학(Suicideetnosographiepsychiatrique)》에서 한 말이다.] 환자로 내몰린 끝에 자신의 인생을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은 언젠가 자살을 시도한다. 그의 과거가 정말 치욕적이었을까? 그의 느낌 안에서는 분명 그랬으리라. ‘에셰크’의 감정 안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모든 것을 실패로 여기며 헤아려본다. 참을 수 없는 중압감이 그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렇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그가 당한 모든 굴욕, 사람들에게 받은 모욕, 껍질만 남아버린 희망 등이 곧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런 것들을 자신에게서 떼어내기가 무척 어렵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떨어짐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썼다. “떨어짐의 고통”은 아프기만 하다. 예견하는 미래는 새로운 아픔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도망치기로 한다. 곧장 달려 숨겨진 비존재로 뛰어든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유일한 탈출구를 찾는다. 그는 이른바 ‘자연적인 죽음’을 기다릴 여유가 없으며 그럴 기분도 아니다. 오로지 아는 것이라고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육신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무의미한 저항만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일 따름이다. 우울증 환자는 얼마나 병든 것일까? 그 병세는 어느 정도일까? 나는 이런 문제를 두고 말하는 직업 훈련을 받지 않은 탓에 자격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논의를 과학계가 귀담아들어 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과거는 치욕적이며, 현재는 고통스럽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문가가 설명한 우울증 환자는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병에 걸린 게 아니다. 그는 다만 다를 뿐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과학은 균형을 잃었다고 말한다. 심리적인 충격으로 별거 아닌 돌발 사건이 무슨 엄청난 일로 부풀려진다. 개밋둑이 그의 눈에는 산처럼 보인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사물’(우리의 예에서는 개밋둑 내지는 산)은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꾸며낸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탁자는 내가 그것을 목적 그대로 이용할 때만 탁자다. 앉아서 일하거나, 식사할 때, 탁자는 비로소 탁자다. 내가 그것을 언제나 방의 벽에 칠을 하는 보조 사다리로만 이용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통상 쓰는 말의 의미에서 탁자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개밋둑이 산으로 변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이를테면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실눈을 뜨고 부지런히 오가는 개미들을 바라본다면 말이다. 이른바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가 측정한다. 그렇지만, 저마다 자신의 척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경험을 통틀어 문제 삼지 않는 한, 내 판단은 맞는 것으로 인정해줘야만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다. 너희에게는 별것 아닌 돌발 사건일 수 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생의 결정적 사건이다. 너무나도 결정적인 나머지 나는 나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이제 자살은 가난과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욕이 아니다. 자살은 더 이상 침울해진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다(중세에는 심지어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우리의 자아는 조각조각 끊어져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기억의 색은 누렇게 바래고, 우리의 현실은 저 끝 모를 바닥으로 빠져든다.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자살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저 치욕을 감수하고 사회가 그 변화무쌍한 변덕 속에서 그의 행위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게 낫지 않았느냐고? 아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의 ‘에셰크’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이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실패자가 될 위험을 예방한 것일 따름이다.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 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 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수확하기 위해 낫을 든 농부, 그의 이름은 죽음이다. 이때 누구든 손수 낫을 들 수 있다. 비유적으로 경계라고 일컬었던 곳에 우리는 이미 도달했다. 벼를 베는 농부가 낫으로 자기 손을 자를 수야 없다. 하지만, 죽은 것만 못한 삶이라면, ‘에셰크’한 상태의 인생이 더욱 추한 것이라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더는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경우, 존엄성과 자유는 곧 율법이 된다.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지 않았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놓는다.

 

 

 

 

몸은 우리의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65에서, 사르트르가 표현했듯, “무시당하는 것(leneglige)”, “침묵 아래 간과되는 것(lepassesoussilence)”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두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몸은 나의 자아를 이루는 일부면서도 저 밖 어딘가에 있다. 세계라는 공간의 그 어딘가에 있으면서 자아의 투사(Pro-jekt)를 이루기 위해 “부정되는 것(seneantise)”이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우리의 몸으로 있으면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내가 앞서 설명했듯, 다른 것, 외부 세계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낯설기만 한 몸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야 비로소 의식한다(이를테면 과학 공부를 통해 몸의 기능을 알게 되면 우리는 몸을 의식한다). 혹은 몸이 우리에게부담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는다. 왜 흔히 고통 때문에 ‘껍데기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말을 쓰지 않던가. 건강할 때는 의식조차 하지 않던 몸이 조금만 아프면 거추장스럽고 빠져나가고 싶기만 한 것이다. 그만큼 몸은 적대적인 것인 동시에 내 것이다. 벗어던지고만 싶은 껍데기는 여전히 우리의 일부, 즉 나라는 ‘자아’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몸으로 세상을 겪는 동안만큼은 몸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높이 뛰어오를 때, 몸은 공기이자 날아오름이다. 스키를 타고 신나게 활강할 때면, 몸은 휘날리는 눈보라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다.

 

 

 

 

손을 내려놓으며 우리의 자아가 자신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가운데 혹여 처음으로 완전히 자신을 실현하는 기쁨을 맛볼 수도 있다. 이제는 존재의 끝이기 때문이다. 있음으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처럼 굳어진, 갈수록 굳어가는 우리의 존재를, 사르트르의 “존재(etre)”를 더는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빠져나와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겨움, 존재를 향한 사르트르의 구토는 자신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끝없이 세상에 몰두하기 위해 영원히 자신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구토는 정반대로도 이해될 수 있다. 구토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을 거부하는 저항이다. 좀 더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수험생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게 틀어지기는 했지만, 이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까짓 학교쯤이야 무시하지 뭐. 인생? 그거 웃기는 거야.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전전긍긍한 거야. 이렇게 말하는 순간 수험생의 머리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그 안에 여전히 두려움이 숨어 있는 평화다. 본능적인 두려움, 떨어짐의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 하는 두려움, 혹시 다시는 두려움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러나 어쨌든 다시 평화를 찾았다. 인간의 근본은 이처럼 모순이다.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상반된 감정이 조금도 양보 없이 양립하며 인간을 무덤까지 따라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생각하는 의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살아 꿈틀대는 생존본능을 무릅쓰고 여전히 지탱하는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이라는 게 과연 뭘까? 본능이든 성향이든, 자신은 죽음에 이끌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뭘 저런 것을 가지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약하지 않을까? 자유죽음은 자신을 없앤다는 순전한 행위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의지의 선택이다. 자유죽음을 택한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에 이끌리는 과정을 겪었다. 조금씩 차근차근 흙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자살자의 인간다운 존엄이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굴욕을 탑처럼 쌓아 올렸다. 유감스럽지만 어찌 번역하면 좋을지 몰라 다시 한번 프랑스어 단어를 쓰겠다. “엉 슈멘느망(Uncheminement).” 이는 이미 나 있는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을 뜻한다. 이 길이 처음부터 그렇게 나 있는 것인지 누가 알랴. 내가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은, 인생에서 부단히 무엇인가 추구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경험이다. 좌절하며 체념과 포기를 할 때 죽음의 성향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게으름에는 죽음으로의 끌림이 숨어 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자리가 될 곳을 향해 이미 자발적으로 이끌린다.

 

 

 

 

죽음에 이끌리는 우리의 성향은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알 턱이 없다. 무기체인 없음으로 끌리는 죽음의 성향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며 무엇일 수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무감함만을 따를 뿐이다. 이로써 다시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다. 말할 수 없는 것, 이는 곧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가 바로 존재의 경계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고 나가겠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으로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개인으로서의 나는 이러저러한 때에 사회가 내세우는 요구를 거절할 뜻을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회의 당위성만 요구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의 답은 꼭 찾아야 한다.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자살을 다루는 사회의 모든 이론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잠재적인 ‘자살자’가 그 뜻을 자유죽음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막으려 혈안이 된다. 이들은 말한다. 생명은 유일한 자산이라고!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내세워지는 이유는 아리송하기만 하다. 신이 허락해준 생명이기에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인생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무슨 대단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라도 부여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런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도 없다. 그 형이상학적인 가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생물학에 지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그리고 어디서나 늘 새롭게 생성(늘 태어난다)되며, 또 취소(죽어 없어진다)되는 게 생명일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자살자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를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를 외면하고 사회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개인의 고유한 내면, 좀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내면에서 우리는 자살자와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독자를 피곤하게 만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결정적인 선택을 내려야 할 인생의 순간에 홀로 처절히 외로움을 곱씹는다. 이런 결정은 내가 나와 일 대 일로 마주 본다는 각오로만 내려져야 한다. 그 어떤 단체의 이상, 내가 보기에는 망상일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 어떤 사회적 이상에 헌신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행동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실존적인 자기 결단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포기하려는 결정조차 그 개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일 따름이다. 다시금 내 의도와는 달리 윤리학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간 것일까? 분명 그렇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나와 사회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너무나 쉽게 개인에게로 책임이 집중되는 탓에 자칫 반사회적인 인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합산으로서의 사회는 개인을 그저 사회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며 각 구성원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사회의 이런 권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을 보호하고 개인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 반면, 그 누구도 사회의 총체적인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컨대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자동차를 몰아 다른 차량과 충돌하면서 상대편에게 신체적 혹은 물질적 손해를 입힐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개인의 생사 여부 결정권은 타인이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윤리라는 문제가 자살자의 상황에 끼어드는 사례들의 범위는 더욱 크게 확장된다. 너무 큰 나머지 우리가 여기서 그 개별 사례의 뉘앙스를 일일이 분석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다. 본보기 삼아 살펴볼 수 있는 경우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적어도 사회는 가장이 자살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가 목숨을 끊으면 가족은 어떻게 먹고살라는 말이냐며 항변한다. 가장은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저 먹성 좋은 식구들에게 사료를 빌어 먹이는 일에 한 치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가족은 가장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로지 게걸스럽게 사랑과 배려와 관심과 책임만 요구할 따름이다. 무조건 이에 동의하고 양보해야만 할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게 정말 꼭 지켜야만 하는 의무인가? 이런 경우 도덕이라는 것은 뭐가 그 기본 원칙인지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죽음을 시도하거나 죽고자 하는 남자가 일할 능력이 없는 병든 배우자와 두 명의 미성년 아동을 데리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사자의 심리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도덕적으로만 보자면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에 인간은 저항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관련 학문들이 보고하는 사례들 가운데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반대로 당사자가 목숨을 끊고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그의 존재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경우는 거의 태반이다. 이는한 인간을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소홀히 여기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까.

 

 

 

 

사람들은 그저 놀라우리만큼 빠른 속도로 죽은 이를 잊어버릴 뿐이다. 남편을 잃은 부인은 이내 다시 웃는다. 또 웃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과부는 다른 여인들과 노닥이며 자신을 위로한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곧 전설이 된다. 종교 수업 시간에 몸을 비비 꼬던 그 지루함으로 전설을 기억한다. “잘못은 늘 자리를 비운 사람에게 있다. 죽은 사람은 이중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죽음이란 죽음 그 이상의 것이다.” 죽음은 죽음 그 이상의 것이다. 죽음을 지워버리는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오물을 치워버리는 일대 청소 작업이다. 자살자는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한다면, 자기 자신에게 순종할 수 있다는 것, 선택은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주님이 주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죽음과 함께 오롯이 홀로일 뿐이다. ‘자연적인 퇴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자 서 있을 따름이다. 이 점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타인은, 우리가 알고 있듯, ‘지옥’이다. 타인의 자유는 나의 자유와 엇갈린다. 타인이 품은 뜻은 나의 뜻을 가로막는다. 타인의 주관은 나의 주관을 파괴한다. 나를 바라보며 반드시 이러저러하게만 살라고 심판하는 타인의 시선은 일종의 살인이다.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나는, 사르트르가 “근원적인 추락, 근본적인 몰락(lachuteoriginelle)”이라고 부른 것을 겪는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나를 노려보며, 내 뜻을 거스르며, ‘나’라는 자아를 고착화시키는 타인은 살인자인 동시에사마리아인이다. 그는 어머니의 따스한 가슴과 간호사의 따뜻한 손길을 가졌다. 아니, 타인은 그 이상의 존재다. 네가 없다면 나는 결코 나일 수 없지 않은가. 무엇을 하든, 뭘 내버려 두든, 증오와 격정으로 몸부림을 치든 아니면 우정을 쌓아가든, 심지어 서로 냉담하든 간에 우리는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타인을 ‘사회’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의례적인 용어의 문제일 따름이다. 타인은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의 자아와 똑같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그래서 타인은, 다시 확인하지만 나와 같은 타인은, 끝장까지 우리와 동행해주는 동반자다.

 

 

 

 

죽음으로 세계가 멈추게 되면 자살자가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세상으로 보낸 그의 메시지는 결국 죽음의 비(非)세계, 있지 않은 세계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질 따름이다. 자신이 죽으면 없어질 세상이 그래도 남아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해 보냈던 메시지는 그저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에르빈 슈텡겔이 말했던 것처럼 자유죽음이 “호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심리학이라는 세계의 공간에 머무르는 셈이다. 호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살자의 내면에 있는 모순, 그를 초월하는 모순, 아마도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인간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선험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심리학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심리학은 살아 있는 자의 학문이다. 실증은 아닐지라도 객관성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단지 ‘나르시시즘’이랄지, ‘대상의 소유’ 혹은 ‘좌절’ 등과 같은 좋지 않은 표현들을 솎아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이미 앞서 다룬 바 있는 놀라운 현상, 즉 ‘타인’과 맞부닥뜨리게 된다. ‘타인’은 곧 나의 거울이다. 아니, 물론 그 이상이다. 경쟁자이자 ‘지옥’으로서 타인은 나의 길을 가로막는다. 여기서 사회라는 이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타인은 나를,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의 나를 원한다. 타인과 나는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난다. 나는 결코 타인이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 타인이 아무리 친절하게 굴어도,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살갑게 대해도, 나는 결코 그가 원하는 그대로따르지 않는다. 나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았음’에도 홀로 있다. 고독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뿌리부터 고독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황량하고 고독한 마당에 나의 고독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군중의 한가운데서도 깊은 고독을 맛볼 수 있다. 드높은 명성을 뽐내며, 나를 추켜세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완전히 홀로 있다는 느낌은 얼마든지 생겨난다. 그렇다고 깊은 고독을 떨치고 일어나 자유죽음을 결행하기로 결심한 사람을 두고 ‘나르시시스트의 위기’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오히려 자살자는 길을 뚫으려는 오랜 개척의 노력 끝에 우리가 홀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어떤 남자가 퇴근하고 집에 가기 위해 어스름한 골목길을 지나며 이렇게 말했다. “다 쓸데없는 일이야. 이토록 수고를 들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꿈꿔온 것은 모두 환상이었어. 아무리 실현하려 노력해도 초라해지기만 할 뿐이야. 이 허튼 일에 끝장을 맺고 말자.” 다만,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게 걸릴 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빵을 달라고 울먹이는 아이들의 얼굴이 밟힐 따름이다.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이며 내일 날씨를 걱정하는 식구를 생각하는 발걸음은 이내 빨라진다. 이처럼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일지라도 일상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혼탁한 물속에서 빠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헤엄을 친다. 그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 그저 나날이 곤궁해지고 갈수록 처량해질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옆 사람보다 더 처참함을 느낀다. 서로 다를 게 조금도 없음에도 말이다. 그저 지치고 피곤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을 쉰다. 내일도 모레도 언제나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고 절망한다. 끝장을 내기로 한다. 다음 날 아침 이웃은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었으며,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 명시적으로 말을 했든 아니든, 인생을 일종의가치로 미리 전제하고 들어가는 심리학의 사실에 맞서 그는 오직 자신에게 알맞은 결단을 내렸다. 물론 이로써 심리학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심리학의 사실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그의 행위는 사회라는 전체, 그 일반만을 주목하는 심리학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일상에 휩쓸려 사는 비(非)행위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했을 따름이다. 홀로 그리고 아마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일지라도 타인 없이는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그의 행위가 ‘나르시시스트의 위기’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세상이 그에게 알랑거리며 마음에 드는 모습을 되비쳐주지 않는다는 게 그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거꾸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좀 더 끌고 나아가 보자면,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남을 사랑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나’라는 자아의 기본 구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 곧 우리의 나는 극히 제한된 정도로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설혹 나온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피상적인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증오한다는 것은 언제나 중간 매개, 즉 다른 사람의 눈길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당신을 이렇게 보고 있소!” 하고 말해주거나 기호로 전달해줄 때만 우리의 자아는 자신을 사랑하거나 증오한다. 게다가 남의 눈길을 통해 생겨난 이런 감정은 늘 유동적이며, 언제든 취소의 명령만 떨어지면 속으로 들어가 꼭꼭 숨는다. 선험적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가슴 깊숙한 곳을 울리는 아주 심오한 체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선험적 자아를 만날 수 있을 따름이다. 또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내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 앞서 나는 이런 정황을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이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성큼성큼 다가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의 일부일 따름이다. 사랑의 기쁨으로 의기양양한 순간이 있는가 하면, 굴욕에 몸을 떨어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 특히 이런 굴욕의 감정은 아주 끈질기게 달라붙어 부담을 준다. 아무리 몰아내려 하고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존재일지라도 한껏 자랑스러운 최고의 순간은 맞이하는 법이다.

 

 

 

 

자유의 요구, 아마도 실제로 몸이 산소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자유의 요구는 끝없이 가지를 뻗어가며 커진다. 왜 나에게는 요트를 타고 바다를 항해할 자유가 허락되지 않을까? 이웃의 라디오 소음이 들리지 않는 널찍한 집이 왜 나에게는 없을까? 어째서 게으름을 피워도 좋을 자유는 없는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 몸의 짐을 벗어던질 자유는 왜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가 갈망하는 모든 자유는 그에 상응하는 부자유로 엄격하게 제약을 받는다. 교차로에 서서 신호등의 빨간색이 멈추어 서라고 명령할 때마다 나는 내 자유가 제약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 도시의 모든 신호등을 없애버린다면, 정체된 차량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리라. 타인들의 자동차 행렬은 내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막으리라. 부자유함이 사라지고 난 뒤에 느끼는 자유는 언제나 매우 짧다. 자유를 느꼈나 싶으면 곧 우리는 다시금 빠져나와야만 하는 강제 상황에 갇히고 만다. 나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나에게 별 소용이 없다. 나는 나의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절대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체념으로만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

 

 

 

 

자유는 영원히 점령할 수 있는 불변의 공간 같은 게 아니다. 자유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며, 늘 새로운 해방을 요구하는 영원한 과정이다. 존재를 위로해주는 해방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해방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존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자유는 실존적인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해방 운동이리라. 해방 운동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프로젝트이며, 평생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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